2008년 전남 담양 몽한각에 보관중 도난당했다가 11년 만에 다시 찾은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을 새긴 목판. 1827년 후손들이 숭례문 현판의 글씨를 다시 새긴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와 문화재청 제공
조선초 세종의 큰 형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서울 숭례문 현판의 친필을 19세기에 다시 새긴 목판들이 도난된 지 11년 만에 경기도 양평시의 한 비닐하우스 창고에서 발견됐다. 2008년 화재로 일부 훼손된 숭례문 현판과 동일한 유일한 목판본이다. 국가지정 보물로, 도둑들이 훔쳐간 지 20년을 넘겼으나 여태껏 행방을 몰랐던 조선 시대 중기의 희귀본 세계지도도 문화재청으로 돌아왔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공조 수사로 도난당한 조선 시대 세계지도인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와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 등 문화재 123점을 회수해 공개하고, 이를 은닉한 혐의로 ㄱ(50)씨와 ㄴ(70)씨를 입건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들은 해당 문화재가 도난 문화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거지 등에 은닉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의 설명을 종합하면, ㄱ씨는 지난해 8월 <만국전도>를 판매하려다 경찰에 적발됐다. ㄱ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름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1300만원을 주고 <만국전도>를 구입했다”고 진술했다. ㄴ씨는 2017년 10월 서울 종로구의 한 불교미술품 특별전에서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을 판매하려다 적발됐다. ㄴ씨는 경찰 조사에서 “2013년에 500만원에 목판을 구입했다”고 진술했으나 ㄴ씨에게 목판을 판 사람은 2015년 사망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ㄱ씨와 ㄴ씨는 각각 고미술품 매매와 골동품 매매를 수십 년 동안 해온 사람들인 데다 언론 보도나 관보 등을 통해 도난 사실과 소장처 확인이 가능한데도 자신들만 아는 장소에 이 문화재들을 숨겨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2007년도 문화재보호법 개정으로 도난 문화재는 문화재청 누리집에 등록이 된다”며 “등재 이후부터는 모르고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선의 취득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가 지정 문화재를 은닉한 사람에게 징역 3년 이상의 형이 선고된다.
실제로 이들은 은밀한 방법으로 문화재를 은닉한 것으로 확인됐다. ㄱ씨는 자신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 벽지 안쪽에 <만국전도>를 숨겼다. ㄱ씨의 집 안에는 함양박씨 가문의 역사와 문화 등이 적힌 전적류 116책도 발견됐다. ㄴ씨는 숭례문과 후적벽부 목판 등 6점을 자신의 주거지인 경기도 양평시 인근 비닐하우스 창고에서 다른 골동품과 함께 방치된 상태로 보관했다. ㄴ씨는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경매업자를 통해 숭례문 목판 등을 처분하려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숭례문 목판이 보관돼 있던 비닐하우스는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비닐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만국지도의 경우 벽과 벽지 사이에 접힌 채로 보관돼 있어 지도의 외곽이 찢기는 등 손상이 있는 관계로 복원하는 데 2달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26년만에 문화재 당국이 회수한 보물 1008호 <만국전도>. 중국 명나라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1623년 편찬한 휴대용 세계지리서 <직방외기>에 실린 만국전도를 바탕으로 1661년 조선의 문신 박정설이 필사한 희귀본 세계지도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와 문화재청 제공
이번에 되찾은 <만국전도> 등의 도난문화재들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많다. 고갱이 격인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류는 <만국전도> 등의 도난 유물을 포함한 7종 46점이 국가지정 보물이다. 영남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학맥을 18세기 이어받은 유학자로 평가되는 소산 이광정의 <소산선생문집(小山先生文集)>을 비롯해 나암 박주대와 그의 현손인 박정로 등에 의해 쓰인 친필본 등으로 이뤄져 있다. 문학, 역사, 의학, 법률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어 박씨 문중의 학문적 바탕을 파악할 수 있는 실물 자료들이다. 특히 <만국전도>는 문신 박정설이 현종 2년인 1661년 채색 필사한 당대 조선의 희귀본 세계지도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다. 중국 명나라에 파견된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가 1623년 편찬한 휴대용 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확대해 정교하게 필사했다. 김성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만국전도>는 1994년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함양박씨 후손의 집안에서 도난된 것으로, 1989년 함양박씨 문중 전적류와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008호로 지정됐다”며 “이번에 회수된 <만국전도>는 알레니가 편찬한 세계지리서 직방외기에 수록돼 있는 만국전도를 필사한 세계 지도 3점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지도”라고 설명했다.
양녕대군 친필 숭례문
목판은 1827년께 후손들이 다시 새겨 전남 담양의 몽한각(양녕대군 증손 이서의 재실)에 보존해왔던 유물이다. 국보 숭례문 편액의 큰 글씨를 판각한 현존 유일의 목판본으로 꼽힌다. ‘후적벽부’ 목판 또한 19세기 중반 양녕대군 유묵으로 인식되고 판각됐다는 점에서 당대 역사상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라고 문화재청은 소개했다. 정제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이번에 회수된 목판은 1827년 양녕대군의 후손들이 숭례문의 현판을 탁본해서 만든 목판으로, 몽한각에서 보존하다 2008년 10월 도난당했다”며 “현재 숭례문 현판의 서체와 동일한 서체로 쓰인 유일한 목판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함께 발견된 후적벽부 목판에 대해서는 “목판의 말미에 ‘시간이 오래돼서 없어질까 두려워서 다시 (목판에) 새긴다’는 내용과 정해년이라는 작성연대, 몽한각이라는 보존 장소도 함께 적혀있다”며 “양녕대군의 유목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경찰과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협조를 통해 도난된 문화재 회수에 지속적으로 단속 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현재 도난된 국가 지정 문화재는 국보 1점, 보물 11점 등 모두 12점이라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오연서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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