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27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강정 해군기지 정문에서 평화단체 활동가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해군기지 건설 찬반을 결정하기 위한 제주 강정마을 주민투표함 탈취 사건에 해군이 개입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조사위)는 29일 해군과 경찰, 해경, 국가정보원 등이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공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위 조사결과를 보면, 2007년 4월26일 강정마을 임시총회에서 해군기지 건설 찬성 결정이 이뤄졌지만, 이는 마을의 운영 규정인 향약에 따른 적법한 총회가 아니었다. 총회 소집 공고와 안내 방송 없이 일부 찬성 주민들만 모여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강정마을은 2007년 6월19일 다시 임시총회를 열어 주민들의 의사를 묻는 투표를 했다. 하지만 해군기지 유치를 찬성하는 주민들로 구성된 ‘해군기지사업추진위원회’(추진위) 쪽의 해녀들이 강정마을 주민투표함을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조사위 조사 결과, 이 탈취 사건에 해군이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해군제주기지사업단장(해군사업단장)이 추진위 쪽과 함께 사전에 투표함 탈취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경찰은 당시 임시총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막기 위해 340명을 현장에 배치했지만, 투표함 탈취 등 불법행위를 막지 않았다. 2007년 8월20일에도 다시 해군기지와 관련한 강정마을 임시총회와 주민투표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해군과 추진위 쪽은 투표 당일 관광을 시켜주겠다며 주민들을 버스에 태운 뒤 투표시간이 지나 마을로 돌려보내는 방법 등으로 주민투표를 방해했다.
군과 경찰, 정보기관이 해군기지 반대 주민을 제압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제주지부 정보처장, 제주경찰청 정보과장, 해군사업단장, 제주도 환경부지사 등은 2008년 9월17일 제주시의 한 식당에서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유관기관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해군기지 반대 주민 등을 상대로 한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하고 국정원과 경찰이 해군을 측면 지원하겠다는 논의가 이뤄졌다. 반대 주민 등을 구속해야 한다는 등의 강경 진압 대책도 나왔다.
지난해 7월11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반대주민회, 제주군사기기 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관함식 제주해군기지 개최 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사위는 이런 과정에서 경찰이 해군기지 반대쪽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폭행과 욕설을 하고 신고된 집회 방해, 무분별한 강제 연행, 불법적인 인터넷 댓글 등 과잉 진압과 인권침해 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했다. 해군이 해상에서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주민 등을 폭행하거나 보수단체 집회를 지원하고 해군기지 찬성 쪽 주민에게 향응을 제공한 사실도 확인됐다.
조사위는 정부에 해군기지 유치 및 건설과정에서 주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물리력을 동원해 사업을 강행한 점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또 해군, 해경, 국정원 등 여러 국가기관이 부당한 행위를 한 점을 인정하고 강정마을회 주민들에 대한 다각적인 치유책을 마련하고 향후 공공사업 추진 때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도 촉구했다.
경찰청에는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 반대쪽 주민과 활동가에 대한 폭행, 폭언, 종교행사 방해 등의 인권침해행위를 행한 것에 대한 의견을 내고 공공정책 추진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경찰력 투입요건과 절차 등을 보완하라고 권고했다.
이날 조사위 조사결과 발표가 나오자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주민회’(주민회)는 정부에 잘못된 해군기지 추진 과정에 대해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즉각적으로 사과하고 지체 없이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단을 꾸려 제주해군기지 입지선정과정과 추진 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또 이번 조사 결과 불법행위에 가담한 국정원, 해군, 경찰, 해경 등 관계자에 대한 책임 있는 조처도 취할 것을 촉구했다. 주민회는 원희룡 제주도지사에게도 제주도 차원의 진상조사와 관련자 처벌 요구했다. 주민회는 조사위의 조사가 경찰을 중심으로 이뤄져 한계가 있다고 보고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 불법행위를 한 군, 정보기관 등의 불법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단을 꾸려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환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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