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명륜동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 은종복(54) 대표는 상자에 책을 담느라 분주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이미 풀무질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책 3분의 1가량이 빠져 있었다. 은 대표는 이 책들 가운데 일부는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나머지는 수십여 개의 상자에 담아 출판사로 반품할 예정이다. 이날은 은 대표가 풀무질에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은 대표는 <한겨레>를 통해 “책방을 지켜줄 사람을 찾습니다”는 말을 전했다. 책방을 이어받을 사람이 있다면 소중한 인문사회과학서점을 폐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은 대표의 말에 고한준(27), 장경수(29), 전범선(28) 등 20대 청년들이 찾아왔고, 6개월간의 인수인계 기간을 지나 12일부터 이들이 풀무질의 새 주인이 된다. 1993년부터 26년 동안 풀무질을 지켜온 은 대표는, 이날 마지막으로 책방을 쓰다듬었다.
은 대표의 마지막 출근 소식을 접한 단골손님들도 간간이 찾아왔다. 이들은 은 대표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했다. 미처 소식을 모르고 찾아온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듬성듬성 비어있는 책꽂이를 보고 의아해하자, 은 대표는 “오늘까지만 일하게 돼 책이 많이 없다”며 “필요한 책을 말하면 주문해놓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은 대표는 마지막 출근에 대해 “26년 삶이 끝난 것 같다”고 표현했다. “지난 5일 세무서에 가서 폐업 신고를 했어요. 신고서를 쓰는 데 3분, 상담하는 데 2분이 걸렸습니다. 33년이 된 풀무질이라는 서점이, 그리고 풀무질에서 보낸 26년 동안의 삶이 5분 만에 끝나는 것 같아 눈물이 나더라고요. ‘귀하의 폐업일은 6월11일입니다’라는 문장이 제게는 꼭 사망 선고처럼 느껴졌습니다.” 은 대표의 폐업 신고 이후 풀무질의 새 주인인 고씨와 장씨, 전씨 그리고 뒤이어 합류한 홍성환(30)씨 등 4명이 오는 7월 정식으로 새 풀무질을 개업할 예정이다.
지난 7일 은종복 대표와 풀무질을 기억하는 단골 손님들이 서울 명륜동 술집 ‘동학’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 책방을 찾은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생 정다훈(32)씨는 “책방을 찾을 때마다 은 대표가 동네 아저씨처럼, 형처럼 맞아줬다. 곧 있을 결혼식에 와줬으면 했는데 제주도로 떠난다고 하니 아쉽다”고 말했다. 이웃 주민 김명희(42)씨는 “‘책방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하는 분이라 인상 깊었고 시집도 많이 추천해줬는데 떠나신다니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 7일에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술집 ‘동학’에서 은 대표를 기억하는 성균관대 학생들과 이웃 주민들, 풀무질의 새 주인들 등 70여명이 모여 환송식도 열었다.
26년 책방을 책임져 온 만큼 은 대표에겐 기억에 남는 장면도 많다. 은 대표는 “지난 1월 풀무질을 떠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텀블벅 모금이 있었다. 900명 넘는 사람들이 2700만원가량을 모아줬다. 사람 숫자에 눈길이 갔다. 900개의 마음이 모인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은 대표는 또 “2주 전쯤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이 찾아왔다. ‘은 대표 수고했어’라며 내 손을 잡고 10분 정도 있다가 웬 봉투를 놓고 갔다. 여러 번 거절했는데 기어코 놓고 가서 집에 가서 열어봤다. 꼬깃꼬깃한 돈, 오랫동안 묵혀놓은 쌈짓돈이 들어있더라”라고 말했다.
책방이 잘 되던 시절의 기억도 있다. 은 대표는 “1993년 김귀정 열사 추모 집회 때, 집회에 가는 학생들이 책방에 가방을 놓고 갔다. 300개 정도 되는 가방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돌아봤다.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귀정 열사는 1991년 5월25일 서울 중구 퇴계로에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다가 전경과 백골단 등에 쫓기다 사망했다. 은 대표는 또 “1994년께 한 단발머리 여학생이 시집을 몰래 가져간 적이 있다. 책을 슬쩍 해 가고서 ‘이런 작은 책방에서 파는 책은 훔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돌려줬다. 책을 훔쳐가는 분들은 종종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특히 마음이 맑았던 것 같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은 대표는 곧 제주도로 이주해 내년 2월께 제주시 조천읍에서 또 다른 인문사회과학서점인 ‘제주 풀무질’을 열 계획을 갖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는 지금보다 작은 규모이긴 하겠지만 인문사회과학서점만큼은 이어나가고 싶다”며 “인문사회과학서점은 캄캄한 바다의 등대와 같다. 성장 패러다임에 갇힌 사회에서, 대형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을 추천해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풀무질의 새 주인들도 은 대표의 뜻을 지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전씨는 “책방 내부나 사람을 불러 모으는 방식 등에서 나름의 변화를 줄 생각이지만 책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대형서점에는 절대 없는 풀무질의 명제를 지키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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