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버지의 전쟁> 제작진이 2017년 7월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영화 제작사·투자사에 체불임금 지급과 근로계약 체결, 4대보험 지급 등을 요구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달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표준근로계약을 지키며 <기생충>을 촬영했다’고 밝혀 화제가 된 가운데, 영화계 노동자 1000명이 “영화 스태프의 체불임금을 지급하고, 근로자성을 인정해달라”며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영화노조)은 19일 “영화 <아버지의 전쟁> 스태프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제작사 대표에 대한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17일 영화계 스태프 1000명의 탄원서를 서울동부지법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항소심 선고는 오는 20일 열릴 예정이다.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관련 기사 : 영화 ‘JSA’ 실제 모델 김훈 중위의 이상한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 <아버지의 전쟁>은 2017년 2월부터 두달 동안 23차례에 걸쳐 촬영을 진행했으나, 마지막 1회 촬영을 앞두고 제작이 중단됐다. 제작사 대표 ㄱ씨는 영화 제작이 중단된 뒤 촬영 스태프 19명에게 모두 4600여만원의 돈을 지급하지 않아 지난해 1월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심 법원은 지난해 10월 스태프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ㄱ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제작사가 스태프들과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을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스태프들에게 매월 고정된 급여·정해진 총액 지급 △촬영계획표 등에 따라 스태프 근무지 결정 △제작사 대표와 협의해 스태프 채용·급여 결정 등에 비춰볼 때 스태프들이 제작사와 사용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한 것이 맞다는 판결이었다. 제작사 쪽은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을 맺은 만큼 (제작사는) 사용자 지위에 있지 않고, 스태프들은 근로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1심 판결이 눈길을 끈 건 영화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법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영화계 일각에서 이번 사건의 핵심이 임금체불 문제보다 영화계 노동자들에 대한 근로자 지위 인정 여부를 다투는 데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스태프들에게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제 등을 보장함에 따라 제작비 상승이 발생한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영화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1심 판결이 확정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에 사용자 단체들을 중심으로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상급심에서 따져보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달리 영화 스태프들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을 경우 제작사는 스태프에게 최저임금과 법정 근로시간 등을 지켜야 하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스태프들과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작품의 숫자가 늘어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계속돼 왔는데,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제 도입이 이뤄진 지난해 무렵부터 사용자 단체 등에서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취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영화노조 등은 최근 영화계에서 표준근로계약서 작성이 확대되는 추세 등을 고려할 때 항소심에서 1심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홍태화 영화노조 사무국장은 “영화 스태프들의 임금체불 진정을 받아들인 고용노동부나 제작사 대표를 기소한 검찰 모두 스태프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던 것”이라며 “행정기관들이 실질적으로 영화 스태프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상황에서 항소심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노무법인 화평의 이종수 노무사는 “2심에서도 영화 스태프를 노동자로 인정하는 판례가 확립된다면 일부 제작사들이 최저임금이나 주 52시간제를 위반하려는 걸 막고, 표준근로계약 준수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스태프들의 4대 보험 가입, 초과근무수당 지급 등을 보장하는 표준근로계약서 사용률(영화진흥위원회 조사 결과)은 2015년 조사 대상의 36.3%, 2016년 48.4%, 2017년 75.4%, 2018년 77.8%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순제작비 4억원 이하(2018년 10억원으로 상향 조정)의 저예산 영화와 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 등이 빠졌다는 점에서 영화 스태프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여전하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