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 금계마을 주민 김용호씨가 22일 아들과 함께 축사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정읍/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현장] 눈에 갇힌 정읍 축산마을
“눈이 그냥 많이 온 게 아니라 지독하게 왔당게. 내가 강원도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눈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렇게 그치지 않고 계속 오는 눈은 처음 봤당게.” 김용호(63·전북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 금계마을)씨는 아랫도리가 다 잠기도록 쌓인 축사에서 더운 김을 몰아쉬며 눈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건네자 “정말로 징한 눈이네이”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눈 속을 용하게도 헤치고 왔구만. 어제 이후 외부 사람으로는 기자 양반이 처음이여”라고 반가워했다. ‘백색 테러’ 맞서 삽·가래로 뜬눈 저항
“보조금 늘려야지 융자 해봐야 되레 빚” 김씨네는 22일 온 가족이 동원돼 그야말로 ‘눈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광주에 사는 아들(36)은 대설주의보를 듣고 걱정이 돼 전날 기차로 미리 와서 아버지 일손을 도왔다. 젖소 70마리를 키우는 김씨는 전날 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눈 때문에 200평의 축사가 무너질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한밤중에도 아들과 번갈아 축사 위에 올라가 삽과 눈가래로 눈을 끌어내렸다. 뜬눈으로 보낸 덕분에 김씨의 축사는 지붕을 받쳐주는 철제가 엿가락처럼 휘기는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1차 싸움에서는 이긴 셈이다. 이웃 도계마을 축사단지가 지난번 폭설에 이어 또 무너져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김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설작업이 그래도 어느 정도 된 호남고속도로 정읍나들목을 빠져나와 덕천면 도계리로 가는 왕복 2차로의 국도는 중앙선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도로와 도로 아닌 곳이 구분이 안 됐다. 전날 54.8㎝의 눈이 내려 호남지역 기상관측 이후 하루 동안 가장 많은 눈이 왔다는 정읍은 온통 눈에 파묻혀 있었다. 앞서 지나간 몇 대의 자동차 바퀴 자국만이 나침반이요 길 노릇을 했다. 천지가 하얀 상태에서는 조심운전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도계리 금계마을 들머리에서 길옆으로 차가 빠져 동네 사람들 신세를 져야 했다. 축사 4곳 등 11곳 붕괴 도계리에서는 축사 4곳, 양계장 2곳, 퇴비사 2곳, 농기계 창고 3곳이 이번 눈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마을 이장 김혁근(51)씨는 “눈이 녹아서 흘러야 문제가 없는데 날씨가 추워 눈 밑이 얼어 흐르지 않아 걱정”이라며 “지금 빨리 지붕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추가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금계마을에 머무는 동안 이웃 도계마을 축사가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농가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소가 깔렸다는 안타까운 얘기도 들렸다. 구조 요청을 받고 가던 차까지 마을 앞 언덕배기를 오르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달려가 힘을 합해 차를 민 뒤에야 구조차량은 눈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김성기(63) 한국구조연합회 상황실장은 “‘소가 눌려 있다’는 소식에 급하게 차를 몰다가 바퀴가 빠졌다”며 “구조 요청은 많고 몸은 하나뿐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0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 때도 활약을 했다는 그는 4일 이후 이 지역에서 일손이 달리는 119를 도와 기동타격대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인회관에서 이날 함께 점심을 지어 먹었다. 점심 자리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폭설 피해로 모아졌다. 손승운(52)씨는 “올겨울 두번째 왔던 눈 때문에 양계장 축사가 무너져내렸다”며 “겨울이라 닭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손씨는 “정부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보조금액이 늘어나야지 융자만 해주면 이자 때문에 어차피 빚이 증가하는 셈”이라고 걱정했다. ‘개방반대’ 트렉터도 눈에 짓늘려 노인들은 아예 전날 밤 회관에서 모여서 잠을 잤다. 한옥례(73)씨는 “어젯밤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이장이 노인회관에서 잠을 자라고 했다”며 “날씨가 궂어서 아예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순자(70)씨는 “내 평생 이렇게 많이 계속 내린 눈은 처음”이라며 “하늘에서 눈을 쌓아 놓고 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 들어 간간이 흩뿌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 4시께부터 다시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눈 천지인 하늘을 쳐다보던 도계리 사람들은 “으휴, 징한 것” 하면서도 다시 축사로 향했다. 전주로 오는 정읍시내 곳곳도 시민과 군인들이 나와 함께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정읍시청 주차장에는 농민들이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를 외치며 갖다 놓은 트랙터와 벼들이 눈을 수북이 이고 있었다. 정읍/글·사진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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