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법한 압수수색의 총체적 결정판이다.”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차문호)가 27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방위사업체 ㈜한화 직원 김아무개씨 등 6명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내놓은 말이다. 압수수색 영장에 적힌 혐의와 무관한 증거물을 압수해 ‘별건 수사’에 활용한 것은 위법하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7월에 이미 1심 재판부가 같은 취지로 무죄 판결을 했는데, 항소심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A4 용지 6쪽에 이르는 자세한 보도자료를 내어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수사기관이 위법하게 압수한 증거를 재판에 쓸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명확한데, 서울고법의 새삼스러운 의미 부여에 고개를 갸웃하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사법농단 재판을 염두에 둔 ‘사전 포석’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동식 저장장치(USB) 등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며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핵심 피고인들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에서 사법농단 사건과 죄명이나 유형이 비슷한 사건들에서 ‘적극적인 법 해석’을 통한 무죄 선고가 잦아진 것도 이런 해석에 힘을 보탠다.
■ “상세히 판결 썼다” 이례적 보도자료
서울고법 형사2부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결론은 1심과 같으나 직권으로 위법사유를 추가하고, 상세한 판결 이유를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으로 주목을 끌지 않은 사건에서 해당 재판부가 보도자료를 내고 ‘자화자찬’하는 경우는 드물다.
재판부의 무죄 판단은 당연해 보인다. 실제 국방부 조사본부(헌병)는 2014년 방위사업청 소속 군인이 한화 직원들한테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는 제보를 입수하고 뇌물 수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범죄와 관련 없는 정보를 선별하지 않은 채 컴퓨터 외장하드와 서류철을 통째로 압수하거나, 압수수색 영장에 적힌 혐의와 무관한 자료까지 압수했다.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예비역 장성 등 피고인 6명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고통을 받은 것에 대해 안타깝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위법한 압수수색 관행은 근절돼야 한다”고 말했다.
재판장인 차문호 부장판사는 사법농단 사건 때도 이름이 나온 당사자로,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역할 분담했나…곳곳에서 ‘호위 변론’
역시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지난 26일 서울고법 전체 판사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채용청탁 혐의로 기소된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의 무죄 판결 중 1심 재판부가 위법수집증거를 지적한 부분을 떼어내 ‘잘된 판결’이라며 안내하는 내용이었다.
판사가 자신과 무관한 재판부의 판결문의 특정 대목을 콕 집어 칭찬하는 전자우편을 돌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다 부적절하다. 김시철 부장판사는 2015~16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 여론조작 사건 항소심 재판장으로, 당시 법원행정처와의 ‘교감’ 사실이 검찰의 법원행정처 이메일 압수수색으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에도 김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 통신망에 “법원 가족 전체에 대해 심각한 문제”라는 자기변호 글을 올렸다. 김 부장판사는 “추후 심리 과정이나 상급심의 판단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검찰이 항소하면 사건을 배당받을 서울고법 재판부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훈수’까지 뒀다.
종합해 보면, 사법농단에 관련된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이 잇따라 위법수집증거 무죄 선고를 널리 알리는 이례적인 행위에 나선 셈이다.
■ 하늘에서 떨어진 판결이 아닌데…
법원 안팎에서는 엄밀한 압수수색을 강조한 판결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최근 이런 원칙주의가 속출하는 배경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대법원이 이미 영장 발부 사유와 무관한 별개 증거를 압수한 경우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여럿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법농단 피고인의 주장과 연관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은 재판에서 “검찰이 위법하게 증거를 수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한화 사건 역시 사법농단 재판에서 다투는 위법수집증거 쟁점과 맥락은 다르지만, 검찰이 수집한 증거를 엄격하게 판단하는 분위기를 쌓아가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 홍보에 나선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재판부가 전면에 나서서 자꾸 알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잘 없다”며 “형사사법의 원칙에 대한 재판부의 고민은 재판 진행이나 판결을 통해 검찰, 변호인과 소통하며 되새김질하고 보완하면 될 일이다. 법원 내부에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고법 한 판사는 “시점이 묘하지만 (수사와 재판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맞다. 앞으로 거의 모든 사건에서 위법수집증거를 따지게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는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는 주체이긴 하지만, 실제 집행 절차와 디테일을 잘 몰랐다. 최근 이슈가 되면서 판사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고한솔 장예지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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