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 ·시민단체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정말 아베가 인간인지 묻고 싶습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76)씨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씨가 돌을 갓 넘은 1944년,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아버지가 일본에 강제징용됐다. 탄광에 끌려간 줄 알았다. 생사도 불분명했다. 이씨가 아버지의 기록을 찾은 것은 해방 뒤 47년이 지난 1992년이었다. 어렵게 찾은 기록에는 아버지가 1945년 6월 중국에서 전투 중 숨졌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씨의 아버지처럼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된 한국인의 수는 782만명(중복 동원 포함)으로 추산된다. 주로 탄광이나 제철소 등에서 전쟁 물자를 만드는 데 동원됐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한국과 일본 법원에 강제징용의 피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지난해 10월과 11월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신일철주금 피해자들이 소송을 낸 지 13년, 미쓰비시중공업 피해자들은 18년 만이었다. 그리고 8개월 뒤인 지난 4일 일본은 한국에 반도체 소재 등 수출을 규제하는 경제 보복을 단행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단체 등은 일본의 ‘적반하장’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강제동원 공동행동)은 5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시민사회단체 입장’을 내놨다. 이희자 공동대표는 “우리가 소송을 진행한 이유는 일본과 한국이 후세에 또다시 전쟁의 아픔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며 “일본 아베 정권은 지금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기업과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는 그날까지 싸우겠다. 지금 일본의 경제 보복은 부메랑이 되어서 다시 일본에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이날 회견문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함께 만드는 동반자인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편협한 배외주의를 부추기는 아베 정권의 정치적 놀음에 절대 이용되지 않을 것”이라며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한-일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아베 정권에 강력하게 경고한다. 더는 역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밝혔다.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다음달 15일까지 강제동원 문제의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시민 서명을 받아 일본대사관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날 같은 시각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옛 일본대사관 터에서 “단순히 일본 제품을 사지 않는 운동을 넘어 판매 중단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한국마트협회 회원사 200여곳이 자발적으로 마일드세븐 등 일본 담배와 아사히·기린 등 맥주, 조지아 등 커피류 등을 반품하고 판매 중지에 나섰고, 편의점과 슈퍼마켓 등으로 캠페인이 퍼지고 있다고 총연합회는 주장했다. 총연합회에는 한국마트협회 외에 전국중소유통상인협회, 서울상인연합회 등 27개 단체가 속해 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누리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동차·전자·의류·화장품 등 업종별로 불매운동 제품 목록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 유니클로·무인양품·에이비씨(ABC)마트 등 의류 브랜드와 세븐일레븐·훼미리마트 등 편의점, 아사히·기린·포카리스웨트 등 식품을 비롯해 러시앤캐시·산와머니 등 금융기관 등도 포함됐다. ‘#역사를잊은민족에게는미래가없다’는 해시태그를 붙이는 누리꾼들도 있다.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가 한국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처로 이뤄졌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일본 여행 취소 인증샷도 올라오고 있다. 한 누리꾼(17****)은 “오사카 여행을 앞두고 뉴스를 접하다 고민 끝에 (항공권을) 취소했다”며 “수수료가 1인당 10만5000원씩 나왔지만 한달 커피 안 마시면 그만”이라고 적었다. 대구시민 최현민(46)씨는 “이번 주말 유니클로 대구 대천점 앞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하며 일본을 규탄하고 일본 기업 불매운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환봉 신민정 기자, 대구/김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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