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만난 장호권 광복회 서울지부장의 서울 합정동 사무실에 태극기와 무궁화 액자가 걸려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적은 액수의 활동비이지만 나라에서 돈을 받기는 처음입니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반독재 민주화 투쟁 지도자였던 고 장준하(1918~75) 선생의 장남 호권씨의 말이다. 그는 1일부터 광복회 서울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임명권자는 지난달 취임한 김원웅 제21대 광복회장이다. 올해 창립 54돌인 광복회는 국가보훈처 산하 공법단체로 정부지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광복회장 선거에서 김 회장의 당선을 도왔어요. 김 회장이 광복회에 난제가 있다고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장 지부장을 지난 8일 서울 합정역 근처 지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광복회 활동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광복회는 부친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기 10년 전에 설립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4년 뒤였다. “장준하 김준엽 선생님처럼 정통성 있는 광복군 출신들은 광복회 활동에 개입하지 않았어요. 광복회가 독립정신을 고양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국민의 정신적 구심이 돼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어요. 설립 초기에는 친일세력들이 자신들의 반민족 범죄를 가리기 위한 병풍으로 이용했죠. 광복회 주축 인사들도 엉터리 사이비 독립운동가들이었어요. 그때 임시정부 관련 단체에서 나온 독립운동사 책에는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가 광복군 3지대 소속이었다는 내용도 있었죠. 엉터리 광복회원들 작품이죠.”
부친은 의문사 16년 뒤인 1991년에야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국장)로 지정됐다. 작년 7월 모친 별세로 장남인 그가 광복회 수권회원이 됐다. 인터뷰 날 지부 사무실은 방문객들로 붐볐다. “제가 오늘 서울 23곳 지회장을 인선해야 합니다.” 광복회원 8천여명 중 서울지부 소속은 2천여명이다. 상근자는 지부장까지 4명이란다.
재임 중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먼저 인적 청산 이야기를 꺼냈다. “광복회 상층 임원들이 그동안 권력에 추종하는 이들로 채워져 있었어요. 인적 청산을 해야죠. 지금 진행 중입니다.” 독립유공자 복지도 강조했다. “광복회는 그간 조직의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갖고 복지 확충에는 소극적이었어요. 독립유공자들이 경찰이나 군인 출신 등 다른 국가유공자보다 더 나은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힘쓰려고 합니다.”
지부의 일상 사업인 독립운동가 선양을 위한 역사 탐방이나 교육에도 의욕을 보였다. “학술대회도 하고 제가 직접 교육도 하려고요. 독립운동사를 이야기처럼 들려주려고 해요. 제가 20여년 전부터 이끈 장준하 선생 장정 6천리 답사 기행에도 그간 1천여명이 참가했어요.” 그는 부친의 모교인 한신대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민족사나 독립운동사 강의도 해왔다.
“장 선생님(장 지부장이 부친을 부르는 호칭)도 어린 저에게 역사 공부를 강조했어요. 선생님은 늘 새벽 4시면 깨어 정갈하게 한복으로 갈아입고 책을 읽으셨어요. 주로 역사책을 보셨죠. 저도 그 시간에 깨우셨어요. 단군이나 고려까지 갈 필요 없이 일본과 우리나라가 얽히는 조선 후기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죠.”
김원웅 광복회장은 임시정부 군무부장과 의열단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 서훈에 적극적이다. 정치권 일각과 보수언론은 약산이 북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 반대 논리의 한 재료가 장준하 선생의 약산 평이다. 장준하 선생은 자서전 <돌베개>에서 약산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분열주의자로 평했다. 아들의 생각은? “장 선생이 일본군에서 탈출해 충칭 임시정부로 6천리 장정을 할 때 26살의 젊은 기독교인이었어요. 청교도적인 생각을 하셨죠. 6천리 길을 걸어 광복군 50명과 함께 임정에 가 보니 임정 요인 한 사람에 당 하나씩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파당이 많았어요. 그때 장 선생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예컨대 약산이 술자리를 마련해 젊은 광복군을 끌어가는 걸 보고 화가 나신 거죠. 한 데 뭉쳐 싸워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끌어간다고요.”
김원웅 광복회장 임명받아 1일 취임
광복군 출신 고 장준하 선생 장남
“독립유공자 복지 확충 힘쓰겠다”
부친 ‘약산’ 비판했지만 ‘서훈’ 찬성
“통일 대비 미래지향 보훈법 필요
식민지 노예근성 주입 교육 바꿔야”
하지만 그는 약산 서훈에 찬성한다고 했다. “7~8년 전인가 약산 고향인 밀양에 간 적이 있어요. 8·15 행사였죠. 그때 약산 부인 박차정 선생(9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묘를 가 보니 외딴곳에 너무 누추하더군요.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가 아니란 생각을 했죠. 약산은 남한 사람입니다. 친일경찰 노덕술한테 수모를 당하고 이북으로 가 거기서는 김일성한테 이용당했죠. 사회주의자냐 공산주의자냐를 떠나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시대에 희생당한 분이죠. 남과 북 양 진양이 다 비토했죠. 통일로 가는 시대에 끌어안고 가야죠. 보훈처도 통일을 대비한 미래 지향적인 보훈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 광복회장의 선거 공약에는 친일찬양금지법 제정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친일찬양 금지 이상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답했다. 골수 친일파 후손은 공직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지금 우리는 일본과 전쟁 중입니다. 임정이 태평양 전쟁이 나고 1941년 12월 일본에 선전포고했어요. 이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종전 선언도 없었고 일본 항복도 받지 못했어요. 일본 극우는 이걸 잘 알아요. 한국은 외교권도 없는 미국의 속국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미국에 빼앗긴 거다. 언젠가 우리가 가져간다’는 생각이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도 우리는 승전국에서 빠졌어요. 국민이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아베가 지금 경제 가지고 난리를 치고 있잖아요. 총칼 없는 전쟁을 하는 거죠.”
그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친일과 민족진영과의 대결 구도로 봤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 친일파와 지주 계층이 많았어요. 지금 자유한국당에도 그 후손이 있어요. 나라를 국민이 팔아 식민지가 된 게 아닙니다. 나라의 엘리트들이 팔아먹었어요. 지금 친일파도 일본이 한국을 먹겠다고 나서면 협조할 겁니다. 골수 친일파를 공직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일본과 급박한 상황에서 그들이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할 겁니다.”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 그가 늘 새기는 부친의 말이란다. “장 선생은 ‘과거에 우리 조상이 못나서 나라를 빼앗겼다, 그런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도 했다. “문 대통령이 선거 전에 한 번 전화를 하셨어요. 제가 적폐청산을 약속하면 돕겠다고 했어요. 적폐청산이 뭔지 대통령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은 그냥 범죄자 처벌이에요. 해방 뒤 친일파가 자신들의 범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게 바로 적폐청산입니다. 식민지 노예근성을 주입하는 교육부터 바꿔야죠.”
부친이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했을 때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입대해 선생님 권유로 월남전에 참전했죠. 선생님은 월남전 파병은 강력히 반대했지만 국회에서 파병안이 통과한 뒤에는 저한테 월남에 갈 것을 권했어요.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 의원이셨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신 거죠.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선생님 뜻을 따랐어요. 11개월 동안 있었죠.”
제대하고는 부친의 민주화 운동을 옆에서 도왔단다. “장 선생님이 1974년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이끌 때 제가 집에서 성명서를 등사해 돌리고 서명도 받았죠. 그 전에는 장 선생님을 모시고 군 장성들도 만났어요. 그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기도 했죠.”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을 호소하던 아들에게 박정희 정권은 테러로 응답했다. 그는 ‘살기 위해’ 나라를 떠났다. 이렇게 27년 가까운 해외 유랑이 시작됐다. 1976년 말레이시아로 도피한 뒤 전두환 정권 초인 82년 귀국했으나 이번에는 보안사에 체포됐다. “제가 70년대 재야인사들과 링크(연결 고리) 구실을 했다는 이유로 재야나 학생운동권 인사를 찾아내라고 고문을 하더군요.” 그해 다시 싱가포르로 떠나 2003년에야 귀국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가족의 생활은 무관심했던 부친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까? “싱가포르에 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선생님 원망을 많이 했어요. 그때 내 머리를 때린 일이 있었어요. 건설 청소 현장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죠. 그가 저를 보고 ‘왜 혼자 여기 있나, 조국에서 싸워 감옥에라도 있어야지’라고 말하더군요. 충격을 받았죠.”
장준하는 어떤 아버지였을까? “바깥으로만 돌아 자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장남인 저한테는 엄격하셨죠. 고교생 때였을 겁니다. 미국 가수가 부른 일본 노래 ‘위를 보고 걷자’가 그때 인기였어요. 제가 아침에 그 노래 판을 틀자 장 선생님이 ‘식전부터 쪽발이 노래를 듣는다’고 판을 마당으로 던지셨어요.”
부친과 많이 닮았다고 하자 이렇게 받았다. “제 바로 아래 남동생이 생긴 것은 장 선생님과 더 많이 닮았죠.” 말을 이었다. “장 선생에게는 특출한 예지력이 있었어요. 미래를 내다보는 판단력이죠. (제가) 그런 판단력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장 선생은 함석헌, 윤보선, 유진오 등 어른들과 대화를 나눌 때 초등생인 저를 늘 옆에 앉아 있으라고 했어요. 귀동냥이라도 어른들 말씀을 많이 주입해주려는 생각에서죠. 그때 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하면서 늘 지폐를 손으로 접으셨어요. 동전 크기로 조그맣게 될 때까지요. 그리고 재떨이에 버리셨어요. 20분에 한 번꼴로요. 버리면 제가 재떨이에서 돈을 주었어요. 고교에 다닐 때 옆에서 어르신들이 정치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제 머리에 답이 나오더라고요. 어떤 문제에 대해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는 걸 유산으로 받은 것 같아요.”
그가 결혼하고 꼭 3개월 만에 부친이 의문사를 당했다. 자녀는? “딸 둘이 있어요. 둘 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한 뒤 큰딸은 미국 컬럼비아대를 나와 변호사로 있고, 둘째는 뉴욕대를 나와 중동 등에서 난민구호 활동을 하고 있어요. 난민에게 생존하는 방법을 가르치죠. 둘째가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죠.”
1976년 그가 말레이시아로 떠난 뒤로 동생 넷과 함께 모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지난해 모친 별세 때는 미국 체류 중인 막내 장호준 목사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장 목사는 2016년 한국 ‘4·13 총선’을 앞두고 ‘불의한 정권을 투표로 심판합시다’ 광고를 미국 현지 신문 등에 게재한 혐의로 기소당해 1심과 2심에서 벌금 200만원과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여권 제한을 받았으나 지금은 풀린 상태다. “막내는 지금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불의한 판결을 내린 판사가 현직에 그대로 있다고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