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회사를 나와 민주노총 전국민주화학섬유노동조합연맹에 ‘취직’한 류호정 화섬식품노조 선전홍보부장이 10일 오전 서울 동작구 화섬식품노조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내 재능이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팬티를 파는 일보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권 증진을 위해 쓰인다면 훨씬 더 보람찬 것 아닐까요?”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화섬식품노조) 선전홍보부장인 류호정(27)씨는 1년 전까지 경기도 판교의 한 유명 게임회사 마케팅팀에서 근무했다. 6년 전 이화여대 재학 당시 교내 이(e)스포츠 동아리 ‘클라스’를 결성해 회장을 맡았을 만큼 류씨에게 게임은 ‘일상’이자 ‘꿈’ 그 자체였다. 하지만 1년이 흐른 18일 오후, 그는 화섬식품노조 상근자가 되어 국회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들의 영상을 촬영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류씨는 왜 게임회사 ‘여직원’ 생활을 접고 민주노총 상근자로 변신한 걸까.
“지난해 8월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어요. 회사에 노조가 세워지기 한 달 전이었거든요. 인사팀에서 ‘인사이동 때 당신을 받겠다는 팀이 없다’며 권고사직 합의서를 내밀었어요. 2년 연속 업무평가가 ‘에이’(A)였는데 말이 안 됐죠.”
지난해 봄, 류씨는 판교 일대에 아이티(IT) 노조 설립 붐을 일으켰던 네이버 노조의 설립 선언문을 접한 뒤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 설립을 추진했다. 마침 주 52시간제 도입을 앞두고 사업직군 근로자대표로 선출된 터였다.
“게임회사들은 어떤 가이드라인조차 없이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사람을 자르는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해요. ‘망한 게임’을 만든 개발자도, 남성 이용자들이 싫어하는 페미니스트 성우와 일러스트레이터들 모두요. 그런데 우리 모두 ‘짤림’의 대상이 돼선 안 되는 거잖아요?”
2016년 7월 국내 한 대형 게임회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페미니즘을 표방한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자사 온라인게임 제작에 참여한 성우 김자연씨를 강제 하차시켰다. 주고객층인 남성 이용자들의 반발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후 게임업계에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사상 검증’ 광풍이 불어 닥쳤다. 정규직이었던 류씨도 같은 일을 겪었다.
“작년 봄 제가 다녔던 회사도 ‘게임업계 여성혐오’ 논란에 휘말렸어요. 그래서 제 개인 페이스북에 ‘이런 일이 또 생겨 너무 슬프다. 나도 가해자가 된 것만 같다’는 내용의 글을 썼죠. 그걸 누군가가 ‘페미니즘 글을 썼다’고 회사에 신고했더라고요.” 마케팅 부서 ‘실장님’은 비핵심부서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지만, 류씨는 거절했다. “직접적으로 ‘글을 지우라’고 하면, 제가 또 페북에 글을 쓸까 봐 두려웠던 거죠. (웃음) 전 마케팅 업무가 좋았어요. 그런 제가 왜 도망쳐야 하는 거죠?”
게임업계 여성혐오는 회사 직원들에게도 만연했다. 팀원들의 업무용 단체 대화방에선 “페미니즘은 썩었다”고 주장하는 남성 직원들의 대화가 일상적으로 오갔다. 마케팅팀에선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속옷 무늬’가 회의 주제였다. “‘이번 시즌엔 휴가철에 맞춰 파란색 땡땡이 팬티 어때?’와 같은 대화가 오가는 거예요. 게임 홍보를 위해 여성 캐릭터에 야한 의상을 입히거나 자극적인 자세를 취한 이미지를 띄우기도 하죠. 그런 걸 만드는 회사에 있다 보면, 구성원들은 점점 젠더 이슈에 무뎌지는 거예요. 문제를 제기하면 ‘매출 떨어지면 네가 책임질래?’라는 말이 돌아오죠.” (
▶관련 기획 시리즈 : 혐오에 쫓겨나는 여성들)
류호정 화섬식품노조 선전홍보부장이 대학 시절 출연했던 ‘아프리카 티브이(TV)’ 방송 광고. ‘게임 아이돌’로 소개된 5명 가운데 맨 오른쪽이 류 부장이다.
류씨가 처음부터 ‘페미니스트’를 선언했던 건 아니었다. 여중·여고·여대를 다녀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체감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게임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한국은 대체로 성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총학생회는 교내 성폭력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오히려 그는 한때 아마추어 게임대회에 출전해 ‘이화여대에 재학 중인 미모의 여성 게이머’라는 타이틀로 남성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며 자신의 여성성을 ‘상품화’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자발적으로 ‘상품’이 된 거죠. 그땐 외모가 괜찮은 편이었거든요. (웃음) 학교에 ‘탈코’(탈코르셋) 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좀 피곤하게 사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게임회사에 들어와서 깨달았죠.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각성’의 결정적 계기는 2년 전 사내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배의 퇴사였다. 가해자는 여러 부하 여성 직원들의 볼을 쓰다듬고, 어깨 등을 만지는 성추행으로 소문이 파다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신고하진 않았다. 피해자였던 류씨도 같은 선택을 했다. “어느날 1년 아래 후배로부터 사내 징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스트레스가 심해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더라고요. ‘만약 내가 작년에 문제제기를 했다면, 이 친구가 같은 피해를 안 겪었을 텐데’라는 후회와 미안함이 컸죠.”
그러나 류씨의 징계위 출석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는 감봉 3개월에 그쳤다. 상급자는 가해자의 잘못을 감싸기에 바빴고, 회사는 ‘가해자와 분리’하겠다며 피해자를 인사발령 냈다. 후배의 새 소속팀은 가해자의 팀 바로 옆 공간에 있는 부서였다. “징계가 감봉으로 끝나자 의기양양해진 가해자가 매일 복도에서 마주치는 후배를 어깨로 밀치고 갔죠. 결국 그 후배는 입사 1년이 채 안 돼 퇴사했고요. 그때 회사가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류씨는 후배의 사건을 겪은 뒤 에스엔에스에 젠더 이슈와 관련한 기사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용기가 없었는데, 후배의 퇴사를 보면서 ‘이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다. 여성혐오가 잘못됐다는 걸 확실히 알려야겠다’ 결심했어요. 나라도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 (웃음)”
류호정 화섬식품노조 선전홍보부장이 디자인한 ‘무지개 화섬식품노조 깃발’. 화섬식품노조 페이스북 갈무리
권고사직 뒤에도 전 직장 동료들의 노조 설립을 도왔던 류씨는 지난해 12월 화섬식품노조로부터 ‘선전홍보부장’을 제안받아 민주노총 상근자로 이직하게 됐다. 판교테크노밸리를 거점으로 한 아이티 노조들이 소속된 화섬식품노조에서 류씨는 전 직장에서 에스엔에스 콘텐츠를 만들었던 전공을 살려 ‘민주노총 아재’와 노동과 진보이슈에 관심이 있는 20~30대 청년들을 연결할 수 있는 홍보를 시도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의 애칭 ‘섬식이’, 화섬식품노조 인스타그램 계정 ‘노조스타그램’(@nojostagram) 등이 모두 류씨의 손에서 탄생했다. “민주노총은 40대 남성의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에스엔에스 홍보를 통해 민주노총이 ‘아저씨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10~20대가 많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든 것도 미래에 대한 투자죠.” 지난해 12월 40여명에 불과했던 화섬식품노조 페이스북 팔로어는 류씨가 ‘페북지기’를 맡은 뒤 7월 현재 2700여명으로 늘어났다. 지난달 ‘서울퀴어퍼레이드’ 때는 ‘무지개 화섬식품노조 깃발’을 제작해 노조를 홍보했다.
민주노총이라고 해서 젠더이슈와 관련한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류씨는 “문제제기 자체가 어려웠던 게임회사와 비교해 젠더감수성도 높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강하다”고 말한다. 화섬식품노조는 최근 류씨 등의 제안에 따라 노조 지회 간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프라인 성평등 교육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게임회사로 다시 돌아갈 생각 없냐고요? 지금은 노조가 제일 재밌는 것 같아요. 아직 화섬식품노조에 여성위원회가 없는데 곧 만들 거고, 0에 가까웠던 노조 페이스북 팔로어를 수천명으로 늘려가는 재미도 있죠. 민주노총에서 하나하나씩 만들어가는 ‘심시티’(도시육성 시뮬레이션 게임)를 하는 기분이랄까요?”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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