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5월29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장시간 진행되자, 양 전 대법원장이 “체력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퇴정 명령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돌발 요청’으로 재판부는 이날 재판은 일단 종료하고 예정된 증인신문을 추후 재개하기로 했다. 검찰은 “지금까지 스스로 퇴정명령을 내려달라 요구한 피고인은 본 적이 없다”며 “이는 ‘재판 거부’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의 사법농단 재판을 맡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는 19일 김민수 창원지법 마산지원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했다. 법원행정처에서 일했던 김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로 법원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방안 등을 모색한 인물이다. 증인신문이 길어지면서 오전 10시 시작한 재판이 밤 11시를 넘기자 침묵을 지켜온 양 전 대법원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도 없이 발언에 나섰다. ‘더는 버틸 체력이 없으니, 퇴정명령을 내려달라’는 것이 발언의 요지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을 하고 있는데 제 체력이 달린다. 13시간째 증인의 증언을 듣고 판단을 하다 보니, 더는 체력이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는 반대신문을 다 하면 예정시간만 해도 최소한 다섯 시간이다. 그때까지 제 체력이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을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다. 제가 없어도 변호인은 있으니 재판 진행은 할 수 있다. 재판장께서 퇴정명령을 내려 제가 퇴정한다 해도 재판은 계속할 수 있다. 퇴정명령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돌발 발언에 나선 시점은 검찰 쪽이 7시간에 걸친 주신문을 끝내고, 고영한 전 처장 쪽 변호인이 4시간 넘는 반대신문을 막 마친 시점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처장의 반대신문은 시작도 하지 못한 상태로, 적어도 서너 시간은 재판이 더 진행돼야 했다.
양 전 원장이 재판에서 직접 발언에 나선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5월 첫 정식 재판에서 13분 동안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한 뒤로 줄곧 침묵을 지켜왔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갑자기 재판을 거부하면서 증인신문을 더 할 수 없다고 한다. 해당 주장의 부적절성을 감안해, 피고인이 없더라도 흔들림 없이 공판절차를 진행해달라. 건강상 이유로 양해를 구하는 것을 넘어서 퇴정명령까지 해달라는 피고인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양 전 원장 쪽 변호인은 “(피고인 건강을) 배려해달라고 하는 것이 재판 거부인지 의문스럽다. 설령 건강한 상태라 하더라도, 현재 밤 11시다. 야간 재판도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진행할 수 있다”고 맞섰다.
양쪽의 의견을 들은 재판부는 증인신문을 중단하고 재판을 종료했다. 재판부는 “원칙적으로는 피고인이 출석해야 공판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지금 피고인의 건강상태를 고려했을 때 증인신문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김 전 심의관의 증인신문은 다음 달 5일 이어가기로 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