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견사슬에 묶인 한센병 환자들 [연재순서]
①정착촌에 갖힌 2세들
②거리의 재가 환자들
③다 말하지 못한 역사
④차별과 편견을 넘어 마을주민 죽창에…병원 세싸움 희생양으로…
비토섬·소록도서 112명 학살 비토섬은 경남 사천시 서포면에 속한 너비 287.4㏊의 섬이다. 사람들은 ‘토끼가 날아가는 모습’을 닮은 이곳을 옛부터 ‘비토’라 불렀다. 섬은 비옥한 농토와 굴·바지락이 많이 나는 갯벌을 아우르고 있어, 위·아래로 나뉜 2개 마을 153가구 450명을 너끈히 먹여 살린다. 섬 ‘아랫 마을’ 뒤에 형성된 솔숲을 헤치던 경남 사천 ㅇ농원 지명석(68) 이장은 “1957년 8월28일, 여기서 한센인 28명이 학살 당했다”고 말했다. 스무살 더벅머리 청년은 노인이 됐고, 48년 동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너른 남해 바다 너머에서 침범해 오는 겨울 바람은 유난히도 차고 매서웠다. 섬 개간 8일만에 피습 한센인들이 이 섬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57년 8월20일. 6·25 전란을 피해 삼천포(현재 사천)로 내려온 한센인 40여명이 1950년 섬에서 남동쪽으로 3㎞ 떨어진 경남 사천군 실안동 일대 해안에 ㅇ농원을 세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구가 200명으로 늘었고, 농원은 넘쳐나는 사람들을 감당하기가 힘겨웠다. 지 이장은 “그때 마을 총무였던 허판개씨가 ‘농토가 없으니 바다 건너 섬으로 가 고구마와 보리를 심자’고 제안해 환자 60여명이 동냥하러 다닐 때 쓰던 배 3~4척을 몰고 바다로 나갔다”고 말했다. 한센인들은 섬에 군용천막을 치고 산비탈을 깎아 개간을 시작했다. 섬의 비옥한 황토흙은 환자들의 쟁기질로 단번에 밭으로 변했다.
하지만 8일 만에 일이 터졌다. 1957년 8월28일 오후 3시께 섬 위·아래 마을 주민들과 바다 건너 서포면 사람 300여명이 한센인들의 정착에 반발해 징·막대기·죽창·삽·곡괭이로 무장하고 천막을 습격했다. ‘투석전’이 잠시 이어지다, 수에서 밀린 한센인들이 천막 안으로 밀려 도망갔다. 한센인들을 천막까지 쫓아간 습격자들은 천막을 무너뜨린 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간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창과 몽둥이였다. 오마도선 간척사업 벌이다 쫓겨나기도
해방뒤 인권유린 진상규명·보상 목소리 불을 피한 사람들은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몽둥이를 피한 이들은 바다로 도망가 물에 빠져 죽었다. 지 이장은 “나는 재빨리 솔숲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며 “해질 무렵 삼천포경찰서 서포지서 직원 2명이 도착해서야 아비규환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때 살아 남은 오삼복(71)씨는 경북 김천시 ㅅ농원에 살아 있고, 하병천(75)씨는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ㅇ농원에서 파킨슨병을 앓는다. 이날 남편 정치일씨를 잃은 박성연(87) 할머니는 “그때 죽은 남편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며 “가해자 쪽에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지금껏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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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60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을 상대로 이뤄졌던 대규모 학살과 인권 침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보호단체인 ‘한빛복지협회’는 앞으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할 사건으로 △비토섬 28인 학살사건 △소록도 84인 학살사건 △오마도 간척 사업 등을 꼽고 있다. 소록도 84인 학살사건은 해방 이후 치안 공백 상태에 빠진 소록도 병원의 주도권을 놓고 병원 직원들과 의사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소록도 8개 마을 대표 84명이 병원 직원들에게 학살 당한 사건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이 1996년 펴낸 <소록도 80년사>를 보면, “병원 운영권을 쥐고 간호주임 오순재·송희갑과 다툼을 벌이던 의사 석사학이 환자들을 부추겨 1945년 8월21일 밤 난동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다음날 간호주임들은 섬 밖에서 치안대원들을 불러 환자 대표 84명을 죽인 뒤 구덩이에 파 묻고 송진유를 부어 불태웠다. "위령비라도 세웠으면" 당시 학살 광경을 지켜본 한센병력자 김아무개(74)씨는 “환자들이 한줄로 줄을 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다”며 “어떤 사람은 총 세발을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이 발로 구덩이에 쳐넣었다”고 말했다. 참상이 일어난 곳에는 추모비가 하나 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2001년 12월8일 현장을 파보니, 아직 썩지 않은 사람 유골이 여럿 발견됐다.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으로 유명해진 오마도 사건은 1962년부터 64년까지 소록도 환자들이 농지 330만평 확보를 위해 인근 오마도 간척 사업을 벌이다 완공 직전에 군사정권의 개입으로 쫓겨난 사건이다. 당시 소록도에 있던 한센인은 5천여명으로, 이 가운데 2500여명이 노동력이 있는 병력자였다. 64년 7월25일 공사권이 전라남도로 넘어갔고, 93년 4월부터 일반 사람들에게 매각됐다. 사천 ㅇ농원 지명석 이장은 “여기에다 그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위령비 하나만 세웠으면 좋겠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은 마을 주민 윤갑식씨는 “이미 지난 일을 따져 물어 후손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면서도 “다만, 그때 있었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토섬·소록도/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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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소록도 인권유린 ‘감금 처벌’받으면 강제‘단종수술’
전쟁물자 강제노역도 한센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것은 해방 이후지만, 해방 이전이라고 환자들의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일제가 한센병 환자들을 모아 놓고 격리 치료를 시작한 것은 1916년 소록도에 전라남도 도립 소록도 자혜병원을 만들면서부터다. 일제는 소록도에 입소한 환자들을 규율하기 위해 병원장이 재량으로 환자를 처벌할 수 있는 ‘징계검속규정’을 만들었다. 환자들은 풍기문란, 화기소홀, 직원명령 불복종, 허위신고 등 죄질에 따라 근신, 감식(식량배급량 감소), 감금 등의 처벌을 받았다. 환자들에게 가장 큰 공포는 단종수술이었다. 일본에서는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시행했지만, 한국에서는 감금실에 갖혔다가 출감하는 환자 모두에게 수술을 강제했다. 단종을 형벌의 하나로 활용한 셈이다. 1933년 수호 마사토 원장이 4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환자들은 강제 노역에 내몰리기 시작했다. 부임하던 첫해에 140만장의 벽돌을 찍어내는 공장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건물 신축 △도로 확장 △발전소 건립 등에 환자들을 강제 동원했다. 국립소록도 병원이 1996년 펴낸 <소록도 80년사>에는 “일제가 1938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환자들을 동원해 해마다 6천㎏의 송진, 3만포의 숯, 30만장의 가마니와 1500장의 토끼가죽을 생산했다”고 적혀 있다. 현장에서 만난 한센인들은 일제가 환자들을 상대로 이상한 주사를 놓는 등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 변호인단은 2004년 8월 소록도 입소자 117명의 위임을 받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센병 소록도 보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1년 6월22일 ‘한센병요양소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강제 수용됐던 환자 한 사람이 800만~1400만엔의 손해배상금을 받았지만, 한국 환자들은 배상에서 제외됐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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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도 간척’이끈 조창원 전 국립소록도병원장 “성치않은 손으로 1300m 메워
정부, 천국의 꿈 빼앗고 모르쇠” “한센병력자 2500여명이, 성치도 않은 손에 삽과 괭이를 쥐고 바닷길 1300여미터를 메웠습니다. ‘천형의 땅’ 소록도 사람들은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과 노력을 모조리 앗아간 정부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상은 커녕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조창원(79) 전 국립소록도병원장은 4일 아직 끝나지 않은 오마도 문제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 원장은 “소록도에서 한센병을 고친 뒤 뭍으로 나갔던 병력자들이 가족과 이웃들에게 버림받고 다시 소록도로 되돌아왔다”며 “병력자들에게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오마도 간척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조 원장은 1962년부터 소록도 북쪽 봉암반도와 풍양반도의 한 가운데 떠있는 무인도 오마도를 육지와 연결하고 안쪽 바다를 메워 330만평의 간척지를 만드는 ‘오마도 대역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역사를 벌여 방조제 1500미터 가운데 85% 가량을 완공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시련이 닥쳤다. 섬 근처 주민들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섬을 내줄 수 없다고 반발했고, 이 지역 정치인도 이에 편승해 간척사업을 가로막았다. 결국 한센병력자들의 꿈과 노력은 고스란히 뭍 사람들 손으로 넘어갔고, 조 전 원장도 1964년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정부는 “당시 한센병력자들이 건설했던 방조제는 모두 소실됐고, 현재 남아있는 간척지는 모두 정부가 처음부터 새로 만들었다”며 병력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 전 원장은 “당시 정부가 공사권을 빼앗아가지만 않았어도 병력자들이 간척지를 완공했을 것”이라며 “최소한 당시 완공됐던 방조제 부분에 대한 보상이라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원장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국립소록도병원장으로 취임한 뒤 지금까지 반세기 가까이 한센병 환자 및 병력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어왔다. 이런 각별한 인연으로 이청준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조 전 원장은 “한센병은 이제 전염력이 거의 없는, 병흔이 좀 남는 ‘피부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조 원장은 이어 “사람들이 한센병에 대한 무지를 깨치게 되면, 오마도 사건을 비롯해 한센병 환자들이 그간 겪어왔던 편견과 시련의 역사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라며 “죽기 전에, 성경 속에서 한센병이 ‘천형’으로 묘사된 뒤부터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한센인에 대한 차별도 끝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내비쳤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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