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밤 서울 을지로3가 인근 ‘노가리 골목’ 전경.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정녕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아 줄 수가 없나. 그대는 모나리자 모나리자 나를 슬프게 하네~”
3일 밤 11시께 서울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 앞 ‘노가리 골목’. 100여 미터 이어진 골목길에선 가수 조용필의 1988년 발표곡 ‘모나리자’가 흘러나왔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지만, 주변 호프집 10여곳 앞에 마련된 150개의 간이테이블은 400여명의 손님으로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끄는 것은 1980년대 가요를 들으며 친구, 연인과 이야기꽃을 피운 손님 10명 가운데 9명이 20~30대라는 점이다.
이날 노가리 골목을 찾은 방문객과 상인들은 최근 2~3년 사이 ‘힙지로’(새롭고 개성이 강하다는 뜻의 영어 단어 ‘힙’과 을지로의 합성어)가 된 을지로 3·4가 일대의 변화를 전했다. 골목에서 제일 큰 가게인 ‘만선호프’ 앞에서 친구들과 셀카를 찍었던 이은화(24)씨는 “최근 친구들이 인스타그램에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나 예쁜 카페 사진을 많이 올린다. 홍대나 강남, 이태원은 요새 식상해서 다들 ‘힙지로 가야 한다’고들 한다”며 “방금 찍은 사진도 이미 인스타에 올렸다. ‘나도 가봤다’, ‘나도 힙스터다’라고 인증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라고 웃으며 말했다. 연구실 선배들과 왔다는 대학원생 김효전(27)씨는 “이태원, 강남과는 차별화된 을지로만의 레트로한 감성 때문에 20대들이 ‘힙지로’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의 나잇대도 다양해 다른 곳보다 열린 공간이라는 느낌이 좋다”고 설명했다. 노가리 골목에서 노래방을 운영하는 백명호(54)씨도 “예전엔 내 나이 또래 50대 손님이 80%를 차지했지만, 지난해 4월부터 연령대가 완전히 뒤바뀌어서 지금은 20대가 80%, 50대 이상이 20%”라며 “에스엔에스(SNS)에 노가리 골목 사진이 많이 올라가서 홍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2013∼2015년 인스타그램 이용자들이 방문한 을지로3·4가 공간 분포도. 논문 갈무리
2016∼2018년 인스타그램 이용자들이 방문한 을지로3·4가 공간 분포도. 논문 갈무리
최근 을지로 3·4가 일대가 ‘힙지로’로 불리며 젊은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가운데,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스타그램 위치정보를 활용해 지난 6년간 ‘힙지로’의 확산 과정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연구원이 1일 발간한 학술지 <서울도시연구> 제20권 제2호에 실린 논문 ‘인스타그램 위치정보 데이터를 이용한 을지로 3·4가 지역 활성화의 실증분석’(김은택·김정빈·금경조)을 보면, 2013년 5건에 불과했던 을지로 3·4가 관련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2016년(1928건)을 기점으로 방문객이 급증한 뒤 2017년 3720건, 2018년 1만705건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2015년은 이 골목에 ‘호텔 수선화’(카페), ‘신도시’(바), ‘우주만물’(잡화점) 등 과거 을지로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힙한’ 가게들이 생겨난 시점이다.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연구팀이 진행한 이번 연구는 2013년부터 2018년 11월까지 인스타그램에 을지로 3·4가가 해시태그(#)로 태그 돼 검색된 게시물 4만5000여 건 가운데 위치정보(주소)가 확인된 1만6971건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했다. 연구팀은 아울러 연도별 이용자들이 방문한 장소의 분포 변화를 지리정보시스템 소프트웨어인 아크지아이에스(ArcGIS)로 지도에 시각화해 ‘힙지로’의 인기를 데이터로 입증했다. 특히 2016년께부터 카페·와인바·레스토랑 등 신규점포가 을지로의 지역 활성화를 이끌었는데, 이 과정에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발생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을지로에서는 ‘을지면옥’과 ‘동원집’ 등 기존 노포가 밀려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유입된 가게들과 동반 성장하는 모습도 확인됐다. 실제 2013~2014년 인스타그램 게시물 수가 10건 미만이었던 ‘만선호프’, ‘을지면옥’, ‘동원집’은 2016년 이후 각각 276건, 336건, 213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논문의 제1저자인 김은택(30) 어반트랜스포머 대표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번 연구의 기획의도에 대해 “도시를 설계하거나 건축하는 전통적인 도시공학의 역할에서 벗어나, 기획자로서 시민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파악해 도시 공간을 활성화하고 싶은 것이 꿈”이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의 니즈를 파악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 데이터를 연구에 활용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를 지도한 김정빈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공학)는 “기존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한 분석은 접근성이나 역과의 거리, 지가, 주변 상업시설 분포 정도 등만을 고려해 서울의 후암동이나 연남동 골목의 ‘힙 플레이스’ 인기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인스타그램을 활용해 특정 공간의 활성화를 연구한 국외 사례는 많지만, 국내의 경우 이번 연구가 최초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하지만 2013년부터 2018년 사이 국내 인스타그램 이용자 수가 늘어나 전체 게시물도 증가한 만큼 을지로와 다른 지역과의 비교연구가 필요했으나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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