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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날 왜 보호소에 보냈나” 묻는 소년에게 “엄마는 널 돌봐주지 못해” 답할 수 없었죠

등록 2019-08-06 08:27수정 2019-08-06 10:13

‘어떤 양형이유’ 펴낸 박주영 부장판사

작가를 꿈꾸다 판사의 길로
10여년 쓴 판결문 책으로 펴내
“재판하다, 기록읽다 운 적 많아
법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양형이유는 사안마다 달라
메마른 문장은 어울리지 않아
소수자·약자 보듬는 양형이유
가해자 참회, 피해자 치유 도울 것”
울산지법 박주영 부장판사. 출판사 <김영사> 제공.
울산지법 박주영 부장판사. 출판사 <김영사> 제공.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재판을 하다, 기록을 읽다 몰래 운 적이 많다. 재판은, 법정은, 아니 어쩌면 인생 자체가 슬프도록 생겨먹은 것 같다.”(<어떤 양형 이유>)

글 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었던 소년은 누군가의 허물을, 죄를 가려내야 하는 판사가 되었다. 법정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그 어떤 곳보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어떤 공무원은 뇌물로 받은 돈을 모아 적금을 부었다. 사기 피해자를 모아 피해 구제 모임을 만든 뒤 이들에게 사기 행각을 벌인 피고인도 법정에 섰다. 소년재판에서 순진무구한 얼굴로 잘못을 빌던 아이들은 열이면 열 재범을 저질렀다.

한 해에만 1천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하며 환멸감이, 무기력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법대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 소년은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숨기기 바빴다고 했다. 폭행과 갈취를 저질러 쉼터에 가게 된 14살짜리 학생이 그에게 “판사님, 저는 엄마가 있는데 왜 쉼터에 보내신거예요?”라고 묻는데 “너희 엄마는 알코올중독에 매일 술을 드시고 널 때리잖아. 엄마는 널 돌봐줄 만한 분이 아니야”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남모를 사정을 사건기록으로, 반성문으로, 탄원서로 접하며 판결문을 쓰다 눈물을 훔쳐낼 뿐이었다.

‘우는 판사’는 대신 자신이 적어 내려간 ‘양형의 이유’를 책으로 엮었다. 울산지법에서 형사합의부 재판장을 맡고 있는 박주영 부장판사가 판결문 너머 독자들에게 보내는 양형의 ‘변’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고픈 메시지이기도 했다. <한겨레>는 지난 2일 울산지법에서 그를 만나 책(<어떤 양형 이유>)을 낸 소회를 들었다.

“처음 출판사 제안을 받아들여 책 출간을 결심했을 땐 ‘법복을 벗을 각오’까지 했어요. (책 쓰는 일이) 판사가 금기시하는 심증을 개시하는 일이 아닐지, 내 가치관을 사회에 알리는 게 맞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판사이기 전에 “사회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야기 중 일부를 해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여전히 먼 존재로 느껴지는 사법부에 대한 신비감을 해소하고, 개인적 가치관은 법률, 법관으로서의 양심보다 후순위에 있기 때문에 사건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고도 전했다.

박 부장판사는 양형 이유에서 사건 당사자들의 마음을 살폈다. 판결문에는 범죄에 대한 법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양형 이유가 담긴다.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법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형량’을 판단하는 양형은 피고인이 처한 상황과 처지, 피해자의 처벌 의사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정해진다.

“(판결문에서) 법적 평가를 감성적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안마다 전부 다른 구체적인 양형의 이유는 메마른 문장보다 따뜻한 언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재판을 하고 싶어 감성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야 피고인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속죄하며, 피해자가 위안받고 치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풀어놓은 섬세한 양형 이유는 ‘약자의 삶’을 위로했다. 2014년 현대중공업 작업 현장에서 잇달아 발생한 시추선 선박 시설물 붕괴, 엘피지(LPG) 선박 화재, 안벽 추락 사고 등으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크게 다쳤다. 원청인 현대중공업은 안전 의무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행법상 벌금 1천만원이 노동자의 ‘목숨값’에 대한 최고형이었다. 박 부장판사는 그나마 가중처벌을 적용해 현대중공업에 벌금 1500만원을 선고했다.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하는 현실은 서글프다. …우주상에 사람의 생명보다 귀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개별 피고인들 전부에게 금고형과 징역형을 선택해 무겁게 처벌하는 이유는, 생명은 계량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자 함에 있다.” 박 부장판사가 사고 책임자와 기업에 대해 남긴 양형 이유다.

원래 그는 현실을 쫓아 법대에 오기 전까진 막연히 작가를 꿈꾼 문학청년이었다. 하지만 방황의 시간이 제법 길었다. “법대 지망은 생각도 않다가 성적에 맞춰 학교에 들어갔었죠. 글 쓰는 일로 먹고 살려다 사법고시에 합격했는데, 연수원 다닐 땐 출결 미달로 잘릴 뻔 했어요.” 겨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해 지역법관제도로 부산지역 관내에서 판사의 길을 걷게 됐지만, 법관의 세계에서 그는 ‘비주류’였다. 사법연수원에서 최고 성적을 받아 바로 판사가 되고, 중앙을 거치는 ‘정통’ 코스를 밟지 않은 까닭이다.

“항상 비주류로 살았던 것 같아요. 법원 안에서는 아웃사이더였고 어디서든 떠돌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수자나 약자에도 친밀감이 있었어요. 반드시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보단, 내가 비슷한 심정이 들었기 때문에….”

책 곳곳에는 법의 보호 영역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눈물이 묻어났다. 박 부장판사는 수천 건의 소년 재판 메모를 10년째 버리지 못했다. 책에는 21명 아이들에 대한 소년재판 메모가 소개됐는데, “아이들의 비행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닌 어른들의 악행을 잊지 않기 위해” 어른의 세계에서 방치된 소년범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책 말미에는 법원의 상처가 돼 버린 사법농단에 대한 생각도 담담히 적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말했다. “과거사 재심 사건을 판단하면서 예전의 사법부 잘못을 재심 판사들이 사과하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 이 사건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법원에 남아있는데도 누구도 잘못했다 말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젊은 판사들이 눈물을 흘리는데, 우리 같은 묵인하고 침묵했던 선배들 잘못이 더 큽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잘못에 일선 판사가 큰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위로에도 고개를 저었다. “법원의 관료주의는 수십 년간 쌓여온 것이었습니다. 판사는 곧 하나의 사법 기관이기 때문에 개인의 목소리가 모두 의미 있는데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위축되면 안되거든요. 스스로 너무 쫄아 있었죠. (판사를) 쫄게 만든 분위기도 안타깝습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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