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저녁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서 열린 영화 <김복동> 지브이 현장 모습. 엣나인필름 제공
“기억이 안 나요. 잊어버리는 약을 먹었나… 어떻게 된 거야, 아주… 그렇게 까맣게 몰라.”
불과 몇 달 전까지 자신과 한집에 살았던 ‘단짝’이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까맣게 모른다”는 길원옥(90) 할머니의 말을 끝으로 화면도 까매졌다. 가수 윤미래가 부른 헌정 곡 ‘꽃’을 배경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상영관 여기저기선 눈물을 닦으며 훌쩍이는 관객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1월,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이자 평화운동가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기록한 영화 <김복동>이 8일 개봉했다. 이날 저녁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점에선 200여명의 관객이 참여한 가운데 영화를 만든 송원근 감독과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김정환),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 변영주 감독 등이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지브이(GV) 행사가 열렸다.
영화 <김복동>은 8년간 김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촬영해온 미디어몽구의 영상에 1992년 김 할머니가 피해 증언을 처음 시작한 이래 정의연이 보관해온 음성녹취, 비디오테이프 영상 등의 기록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개봉일이 8일로 정해진 건 오는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과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일주일간 김 할머니의 모습과 생전 활동을 관객들에게 알리고자 한 제작진의 의도였다.
영화 제작은 미디어몽구의 제안으로 추진됐다. 2011년 12월 수요집회 1000회를 앞두고 김 할머니와 인연을 맺게 됐다는 미디어몽구는 “곁에 있다 보니 평소 할머니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냥 찍게 됐고, 그렇게 촬영한 영상들이 몇 년간 쌓이다 보니 중요한 기록물이 됐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송 감독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지난 27년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투쟁 과정 속에서 김복동이란 인물이 한국과 일본 정부, 유엔(UN)의 입장과 변화에 따라 어떤 일들을 했는지 역사 속에서 김 할머니가 걸어온 길을 짚어보고 싶었다”며 “김 할머니가 걸어온 길은 우리가 미래를 위해 남겨둬야 할 공적 가치가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일 개봉한 영화 <김복동> 스틸 사진. 엣나인필름 제공
생전 김 할머니에 대한 추억담도 소개됐다. 미디어몽구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던 당일 침착했지만 큰 충격을 받았던 김 할머니의 모습을 언급하며 “그날 할머니께 ‘다음 생에는 뭐가 되고 싶나’라는 질문을 여쭤봤는데 ‘엄마가 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와 함께한 8년 동안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윤 이사장은 “할머니께서 마지막 병상에서 유언처럼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라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건 사람에 대한 희망이자 활동가들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생각한다”며 “김복동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우리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할 것이라는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1995년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를 만들었던 변영주 감독은 “김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에도 ‘단역’으로 출연하셨다. 원래 정말 조용하고, 모든 걸 접고 고향 부산에 내려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시기 전까진 앞장서서 싸웠던 분도 아니었다. 그런 분이 몇 년 전 ‘김복동 평화상’을 만들어 시상하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원래부터 투사였던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우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보게 됐고, 그 과정에서 인권운동가로 진화하셨던 거다”라고 자신이 기억하는 김 할머니의 변화를 설명했다.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신파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했다. 영화는 역사적 비극이 낳은 ‘피해자’가 아니라 2012년 ‘나비기금’을 만든 전후 인권운동가로서 활동해온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조명한다. 윤 이사장은 “위안부 문제는 오랜 기간 ‘여성문제’ 또는 ‘민족문제’로만 치부되며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그런 외롭고 고립된 상황에서 전 세계의 정치가들을 만나 특유의 카리스마와 조리 있는 기억들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강인하게 싸워온 분”이라고 말했다. 윤 이사장은 이어 “영화에선 할머니가 굉장히 강하게 싸우는 모습 위주로 나오지만, 동일본 대지진 때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을 돕기 위해 기부를 했을 만큼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공감력이 굉장히 높았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변 감독 역시 “1991년 처음 피해를 증언하셨던 고 김학순 할머니, 1990년대 위안부 피해의 참상을 그림으로 알렸던 고 강덕경 할머니와 더불어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운동의 ‘깃발’이 되어준 분”이라며 “1998년 모든 걸 접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2010년 들어 다시 운동을 시작한 김 할머니는 그 무렵 관성적으로 이어져 온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다시 불을 붙이신 분”이라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한 영화관에서 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 홍보 화면 앞으로 관객들이 지나고 있다. 이 영화는 1992년부터 올해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걸어온 발자취를 차분하게 되짚는 작품이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이날 행사에선 최근 한-일관계 상황에서 ‘착한 소비’의 개념으로 영화 <김복동>이 소비하지 않았으면 하는 당부도 나왔다. 변 감독은 <김복동>이 이른바 ‘영혼 보내기’(실제 영화는 보지 않고 좌석 예매만 하는 것) 운동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과 관련해 “보통 위안부 피해 여성을 다룬 영화가 개봉하면, 할머니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 때문인지 ‘영화 보러 갈 시간이 없으면 표라도 사서 돈이라도 내자’는 의견들이 나온다”며 “그런 식의 티켓 구매는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로서의 불행을 이겨내고 인권문제를 위해 싸웠던 분이다. 그런 삶을 살았던 할머니를 동정하지 말고 ‘깃발’로 함께 만드는 관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던 직장인 정아무개(35)씨는 “지난해 ‘관부재판’(1992~1998년 김학순 할머니 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공식 사죄를 요구한 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를 보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영화를 보러 오기 전 여러 장의 티켓을 구매해 할머니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변 감독님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영화를 통해 ‘인권운동가 김복동’의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관객 박찬훈(25)씨도 “평소 역사 관련 책이나 뉴스에서만 봤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상을 영화에서 접하며 그분들의 삶을 가까이 느낄 수 있어 뜻 깊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길원옥 할머니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송 감독은 <한겨레>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30년 가까이 할머니들을 돌봐드리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워온 건 정부가 아닌 정의연 등 민간단체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길원옥 할머니가 김 할머니를 기억 못 하시는 장면을 보여준 것도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의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젠 정부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