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ㄱ씨에게 지인과의 대화 내용을 녹음하라고 지급한 태블릿피시와 ㄱ씨가 사용한 녹음프로그램. 이 태블릿피시는 국정원에 반납된 상태다. ㄱ씨 제공
국가정보원이 최근까지 정보원에게 돈을 주고 시민단체 관계자를 비롯한 특정 대학 출신 인사 수십명의 동향을 파악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은 적법한 ‘내사’라고 주장하지만, 정보원에게 억대의 금품을 주고 시민단체에 가입하게 하거나 집에 녹화장비를 설치해 드나든 사람들을 확인하려 한 정황까지 나와 위법 수사와 민간인 사찰 논란이 제기된다.
2014년 9월부터 이번달까지 국정원의 정보원으로 활동한 ㄱ씨는 27일 <한겨레>와 만나 지난 5년 동안 월급 형태로 200만원, 성과급 명목으로 수십만원 등 총 1억원을 받고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했다고 털어놨다. 서울의 한 대학교 단과대 학생회장 출신인 ㄱ씨는 부모의 만류로 2006년 학생운동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ㄱ씨는 기무부대장 등이 학생운동 전력 등을 캐묻자 불안해, 2007년 1월 기무부대에 학생운동을 한 사실을 신고했다고 한다. 이후 ㄱ씨는 2013년까지 국정원의 내사를 받았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충남에서 학원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ㄱ씨는 2014년 아버지의 캠프장 사업을 돕고 있었다. 그때 ㄱ씨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자신을 “아르오(RO·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며 국정원이 수사해 정당 해산 등으로 이어진 사건) 수사를 했던 사람”이라고 밝힌 국정원 직원들이 ‘사업’을 제안했다. ㄱ씨는 “당시 국정원 수사관들이 내가 나온 대학 출신 몇몇의 이름을 대며 ‘동향을 파악하는 일을 해주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ㄱ씨를 여러 차례 찾아와 설득한 뒤 수십만원의 돈을 전달했다. 생활고를 겪던 ㄱ씨는 결국 국정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옛 운동권 지인들을 만나 대화를 녹음하고 이를 국정원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국정원은 ㄱ씨의 활동을 위해 녹음장비가 숨겨진 가방을 만들어주며 “아르오 사건 때 쓰던 녹음기인데 이게 제일 녹음이 잘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2016년 가을 무렵부터 국정원의 행동은 더 대담해졌다. ㄱ씨는 “국정원에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라고 한 뒤 그곳의 위원장 ㄴ씨와 함께 살라고 서울 신대방동 쪽에 집을 얻어줬다. 방 안에 있는 화재감지기에 모형 카메라를 설치한 뒤 ㄴ씨가 의심하지 않으면 실제 카메라를 설치하겠다고 했다”며 “방에서 있던 일들을 아는 척 이야기하는 걸 보면 실제 설치한 것 같다”고 했다. 국정원은 실제 ㄱ씨가 해당 단체에 간부로 들어가자 100만원을 성과급 형태로 줬다. ㄱ씨는 그보다 앞선 2014년에도 자신과 아버지가 운영하던 캠핑장에 지인이 올 때 소화기 형태의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했다.
ㄱ씨가 국정원 직원과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들어보면, “전체가 모여서 하는 모임도 있을 수 있지만, 두세명이 모여서 하는 모임도 있잖아. 잠깐 중요한 얘기 같은 건 핸드폰 녹음(을 하면 되잖아). 그거를 일주일 내내 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일주일에 하루만 하라는 거 아니야. 그 정도만 도와주면 우리도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거야”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국정원은 또 ㄱ씨에게 통합진보당 사건 관계자들에게 접근해 ‘국가 피해자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척하며 영상을 찍어 오라는 주문도 했다고 한다. 영상 장비 등은 국정원에서 사줬다. <한겨레>가 확보한 ㄱ씨의 유에스비(USB)에는 당시 촬영한 인터뷰 영상이 여러 건 저장돼 있다.
ㄱ씨는 여러 차례 양심의 가책이 들어 활동을 그만두려 했지만, 그때마다 국정원은 돈으로 회유했다고 한다. ㄱ씨는 최근 자신이 감시하던 대상 중 한명이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신용대출을 받아 돈을 빌려주자 지금까지의 활동에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ㄱ씨는 “나를 진짜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모든 내용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ㄱ씨에게 감시하라고 지시한 인물들 상당수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ㄱ씨는 “대부분 기자나 변호사, 노무사이거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공부모임 정도를 함께하는 등 내가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국정원이 진술서를 쓰라고 할 때 사실대로 쓰니 ‘그렇게 쓰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니 다시 써야 한다’며 진술 내용을 코치했고, 지시대로 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ㄱ씨는 “국정원에서 진술서를 작성한 것이 50차례는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2016년 6월 ㄱ씨와 국정원 직원들이 자료 전달 등을 목적으로 공유한 전자우편에는 ‘고대 민동(민주동문회) 주요인사 연락망’이라는 엑셀 파일이 포함돼 있었다. 엑셀 파일에 담긴 32명 명단에는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대부분은 교수나 변호사 등이었다. ㄱ씨는 “국정원 직원이 자신들이 입수한 파일이라며 여기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면 그 대화를 잘 기억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계속됐다. ㄱ씨는 “국정원 직원들이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지금 감시하는 사람들이) 더욱 활개치기 때문에 언젠가 호기가 온다. 정권이 바뀌어도 상관없다’며 ‘사업’에 지장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ㄱ씨의 주장에 대해 “적법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내사 사건”이라고 해명했다. 2007년 ㄱ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조직을 먼저 신고해와 내사를 하다가 2013년에 중단했지만, 해당 조직의 추가 내사가 필요해져 2014년 10월 ㄱ씨에게 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또 “ㄱ씨가 국정원 지시를 받아 사찰했다고 주장한 대상자 대부분도 본인이 직접 제보한 사람들”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ㄱ씨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국정원의 회유와 강요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참여연대와 천주교인권위원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참여하고 있는 ‘국정원 감시네트워크’는 이날 성명을 내어 “대공 수사를 명목으로 민간인을 정보원 삼아 5년 가까이 민간인들의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온 것은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과 과거 여러번 문제가 된 ‘민간사찰’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검찰 수사를 요구했다.
정환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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