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출신 민주지사이자 의문사 희생자인 고 장준하 선생의 3남 장호준 목사가 1일 입시비리 등의 의혹을 받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 조아무개씨에게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 응원의 뜻을 밝혔다.
“미국 코네티컷 맨스필드타운에서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장 목사는 “최근 조양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오히려 조양이 당하고 있을 일에 더욱 화가 났고 많이 아팠다”며 몇번의 망설임 끝에 동네 아저씨의 마음으로 글을 보낸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 일화부터 소개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동네 공터에서 야구를 하다가 남의 집 물건을 깼을 때가 있었는데, 집주인은 친구들의 머리를 몇 대씩 쥐어박고 보내주면서도 자신에겐 “넌 저 아이들처럼 놀면 안 된다. 너희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데, 네가 이렇게 놀면 되겠니?”라고 말했다. 억울했다. 아버지 이름을 꺼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장 목사는 “내게 아버지의 이름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시치미였다. 학교와 군대에서 요시찰 대상이 되어 부당한 압박을 받았던 것도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이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이름이 큰 혜택을 주기도 했다고 했다.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동문수학하셨던 교수님 덕이었다. 해외 후원금을 받으며 암울했던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역시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는 ‘하필 내가 왜 조국의 딸이어서'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 내 아버지가 조국이다'라는 소리가 더 크게 외쳐지리라 믿는다”면서 “조양의 아버지에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는 자들로 인해 조양이 겪을 아픔의 시간들을 자랑스럽게 새겼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당부했다. 이어 “물론 나는 조양에게 ‘괜찮아질 거예요, 힘내세요’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나이 환갑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장준하 선생의 삼남’이라고 소개하고 이제는 내가 그렇게 소개되는 것이 자랑스럽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어느 날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처럼 조양 역시 어느 날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보게 되겠지만 아마도 지금은 조양이 아버지를 안아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조언한 그는 다시한번 “‘그래, 내가 조국의 딸이다'를 더욱 크게 외치는 조양이 되길 믿는다”라며 글을 맺었다.
장호준 목사가 고2 때인 1975년 8월22일 고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에서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장호준 목사 페이스북 갈무리
3남2녀 가운데 막내 아들인 장 목사는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 장례식 때 고교 2학년으로 영정 사진을 들었다. “돌아가신 뒤,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그때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싱가포르에서 6년 동안 선교사 활동을 하고 귀국했다. 장인의 개척 교회에서 사역하던 그는 소속 기장 경기노회와 코네티컷 컨퍼런스의 파트너십 체결에 따라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2013년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미주희망연대’ 의장을 맡는 재외동포들과 한국 민주화운동을 펼쳐온 그는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미국 보스턴에서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신문광고와 시위를 했다가 불법선거운동인 혐의로 여권 반납을 당했다. 불구속 기소로 궐석재판에 넘겨져 2018년 4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즉각 항소해 법정 투쟁을 계속한 그는 그해 7월 모친 김희숙 여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모친의 임종 직전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제는 말씀조차 못 하실 만큼 위독하시지만, 제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자식이 옳고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해, 정의로운 일을 위해, 항소를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 보시기를 더 원하시리라 믿는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앞서 그해 5월부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씨의 여권을 돌려달라’는 청원이 두 차례 제기됐고 총 1만5천여명이 힘을 보태기도 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