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초등학교에선 서로 존중하는 차원에서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학생들에게 권한다고 한다. 지난 7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학생들이 빵을 먹으며 웃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저기, 혹시 ○○아파트 205동에 살지 않아요?” 연하인 한 남성의 질문에 지나가던 여성이 답했다. “네, 그런데요. 왜요?” 그 남성은 “저도 같은 동에 사는데 괜찮으면 아침에 학교 같이 다니실래요?”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 대화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각각 초등학교 4, 5학년이다. 서울 잠실에 사는 여학생 어머니 김은솔(가명)씨가 딸을 데리고 하교하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다. 김씨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존댓말 사용을 권한다고 한다. 김씨는 “예전 우리 어릴 때는 보통 ‘야’ ‘너’ 하며 반말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아이들이 서로 존댓말을 써서 놀랐다”고 말했다.
이 대화 사례는 서로 ‘님’ 호칭을 하고 존댓말을 쓰는 서울 양천구 신은초등학교 학생들의 생활언어와 비슷하다. 일부이긴 하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의 존댓말 용례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1960~80년대 ‘엄마’ ‘아빠’란 말이 아기들의 유아적 호칭으로 쓰이다 지금은 성인들도 보편화해 사용하듯, 일부 초등학생의 존댓말 문화가 확산하면 언젠가 언어예절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둘 이상이 만나면 서열을 탐색하고 질서가 정해지면 윗사람은 반말, 아랫사람은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존댓말과 반말은 상대를 처음 만날 때 던지는 첫 질문에서 갈리곤 한다. “몇 살이세요?” “학번은 어떻게 되세요?” 등의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되면 나이, 지위, 학번 등으로 서열 호칭이 정해지고, 한쪽은 “편하게 할게요”라며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다. 첫 질문 자체가 서열화 행위인 셈이다.
최근 10~40대가 참여하는 ‘수평어 모임’이 눈길을 끈다. 이 모임 참가자들은 주최자가 정한 날짜에 특정 장소에 모여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 대화한다. 조건은 두가지다. 나이 묻지 않기, 존댓말하지 않기다. 첫인사도 모두 ‘안녕’이다. 각자 이름과 자기를 알릴 수 있는 핵심 단어 세가지를 말한 뒤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 된다. 수평어 모임에 참여했던 조수영(가명)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회사에서 하지 못했던 말도 하고, 친구랑 이야기하듯 슬픈 대화도, 즐거운 대화도, 취미생활 대화도 할 수 있었다’고 썼다. 나이를 떠나 서로 말을 놓더라도 존중하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계에 따른 상하 관계가 명확한 공직사회에서는 최근 호칭부터 언어 예법까지 서로 예우하며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한 공무원은 “애매한 관계면 무조건 존댓말을 쓰려고 한다. 예전보다는 전반적으로 수평적으로 변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사무관 시절 금융정책국 총괄서기관에게 업무상 전화를 했다가 “어떻게 한참 어린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하냐”며 불려가 혼났다는 기획재정부의 한 공무원은 “지금 반말하고 그러면 소문나고 꼰대가 된다. 요즘은 초짜 사무관들이 10년차 이상 선배한테도 가볍게 농담하듯 할 말은 한다”고 말했다.
신지영 고려대 교수는 책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언어는 습관적으로 굳어진 것이어서 언어 표현에 담고 있는 생각과 관점이 우리에게 부지불식간 배게 된다”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을 때는 새로운 언어 표현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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