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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뉴스AS] "피해자 말이 다 옳다?" 성인지감수성의 오해와 진실

등록 2019-09-14 09:12수정 2019-09-14 16:58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문에서 처음 언급
피해자 놓인 맥락 고려하자는 반성적 개념
사실관계 더욱 정교하게 살펴보자는 취지
“감수성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오해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 진술은 주요 증거
“증거 없이 유죄 판단”도 잘못된 주장
지난 9일 대법원은 자신의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54) 전 충남도지사에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다수 언론이 안 전 지사 유죄 판단의 핵심 요인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꼽았다. 안 전 지사가 처음 실형을 선고받았던 지난 2심(2월 1일)과 같이 성인지감수성은 포털 사이트 급상승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렸다. 덩달아 성인지감수성을 둘러싼 오해도 늘었다. “성범죄 재판에 뚜렷한 증거가 없더라도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하면 피고인은 다 유죄 선고를 받는다”는 식이다. ‘킹인지 갓수성’이라는 왜곡된 용어도 이같은 인식에서 만들어졌다. 성인지 감수성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살펴봤다.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2월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법정구속돼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수행비서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2월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법정구속돼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피해자 놓인 맥락’ 외면하지 말자는 반성적 개념

성인지 감수성이 판결문에 언급된 것은 지난해 4월이다.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해임됐으나 “그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낸 대학교수 재판에서다. 원심 재판부는 교수가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데, 피해자 대응이 판단의 근거가 됐다. 피해자가 익명 강의 평가에서 교수에 ‘백허그’당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점, 피해 이후에도 계속해서 해당 교수의 수업을 수강한 점, 피해 신고 뒤 피해 사실 진술을 거부한 점이 “성희롱, 성추행 피해자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원심 재판부 판단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통상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문제 삼는 과정에서 온갖 2차 가해에 시달리게 된다. 가해자가 교수인 만큼,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제기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대처 양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같이 피해자가 놓인 ‘전후 맥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대법원은 “성희롱 관련 소송을 심리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짚었다. 이는 양성평등기본법 제5조1항에 따라 법원이 국가기관으로서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지점이라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그동안 법원은 ‘통상적인 성폭력 피해자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이른바 ‘피해자다움’이란 관점에 갇혀 성폭력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해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피해자가 범행 방법이나 구체적인 시간 등 사소한 부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해자에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성인지감수성은 이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반성적 차원’에서 나온 개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판사는 “상급법원인 대법원이 하급 법원에 ‘앞으로 증거 판단할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놓인 맥락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라’고 가르쳐주기 위해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편견 없이 정교하게 사실을 따져보자는 태도

성인지 감수성을 둘러싼 오해 중 하나는 “법과 이성의 논리로 판단해야 할 법원이 감수성만 가지고 피해자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지감수성은 피해자 말이 다 진실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한다”는 형사 재판의 대원칙은 변함이 없다. 피해자 진술만 가지고 신빙성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평소 관계, 범행 전후 주고받은 메시지, 수사기관 신고 경위 등을 보충해 그 판단을 보강하게 된다. 이때 성인지적 관점을 가지고 피해자가 처한 앞뒤 맥락을 좀 더 세심하고 정교하게 살펴보자는 것이 ‘성인지 감수성’이 전제하는 태도다.

친구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30대 남성 사건을 살펴보자. 1심 재판부가 가해자에 무죄를 선고하자, 피해자 부부가 “죽어서 복수하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간에 알려진 사건이다. 대법원은 강간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사건 전후 피해자가 보인 태도를 근거로 피해자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모텔 주차장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영상 속 피해자가 ‘강간 피해자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설명하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와 담배를 피우거나 가정 문제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점도 ‘강간 피해자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폭력조직 조직원인 가해자의 폭행, 협박에 시달려왔던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고, 모텔 영상 또한 “신체 접촉 없이 각자 떨어져 앞뒤로 걸어간 것”에 불과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이를 간과한 원심판결에 ‘성인지감수성’을 가지고 피해자가 처한 앞뒤 맥락을 다시 살펴보라고 지적했다.

류영재 판사(춘천지법)는 “성인지 감수성은 증거 없이 감성으로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때, 최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구체적으로 피해자가 처한 상황과 맥락을 파악해 폭력의 전개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는 얘기다. 사실인정을 좀더 객관적이고 정확히 하자는 일반론”이라고 대법원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 성폭력 범죄 재판에서 피해자 진술은 주요한 증거

성인지감수성을 둘러싼 또 다른 오해는 “법원이 증거도 없이 성인지감수성만 가지고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는 것이다. 안 전 지사 사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의 배복주 공동대표는 “성인지 감수성이 안희정 지사 사건 판단의 전부가 아니다. 사건의 주요 증거인 피해자·피고인 진술 등을 꼼꼼히 살펴봐 내린 결론”이라고 설명한다.

성폭력 범죄는 보통 은폐된 장소에서 은밀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직접 증거인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따지기 위해, 상황에 따라 그 진술이 변하지 않는지(일관성),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정도로 자세한지(구체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안희정 전 지사 사건에서도, 피해자 진술은 주요한 직접 증거였으며 이 증거가 ‘믿을 만하다’는 법원의 사실관계 판단이 유·무죄를 가르는 주요 요인이 됐다.

대법원이 손을 들어준 2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는 안 전 지사의 10가지 범죄 행위별로 피해자 진술이 믿을 만한지 살펴봤다. 안 전 지사가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보인 행동, 범행 당시 안 전 지사의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에 관한 피해자 진술을 따져본 결과, “피해자의 대응과 감정은 수사기관에서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됐다”고 판단했다. 또 김씨의 진술이 실제 겪어보지 않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무고의 동기’도 없다고 봤다. 피해자한테 피해 사실을 전해 들었다는 전임 비서의 진술이나 피해자의 텔레그램 메시지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했다.

그에 비해 안 전 지사는 거듭 진술을 번복했다. 안 전 지사 진술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거나 직접 증거인 피해자 진술과 결합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 정황” 중 하나였다.

안 전 지사는 검찰 진술과 달리 재판 과정에서는 네 차례의 성관계와 한 차례의 신체 접촉 외에는 모두 부인하는 취지로 진술을 뒤바꿨다. 첫 번째 간음 피해만 살펴봐도, 성관계 동의 여부에 관한 안 전 지사의 진술은 1·2회 검찰 피의자 신문 → 2심 법정 피고인 신문에 따라 다소 변화했다. 2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하게 된 시점과 방법, 성관계에 이르게 된 경위에 관한 진술, 앞서 자신이 한 진술의 취지를 계속해서 번복”하는 등 피고인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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