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김지은씨 대리인단으로 활동했던 김두나(왼쪽부터), 문은영, 정혜선, 서혜진 변호사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 빌딩에서 재판 과정에서의 소회 등을 밝히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2019도○○○○, 피고인 안희정.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지난 9일 오전 10시10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제1호 법정. 안희정(54)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최종 선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안희정 공대위) 구성원과 ‘피해자 공동대리인단’(대리인단) 변호사들이 일제히 “와~” 하는 환호성을 터트렸다. 1년6개월간의 긴 싸움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죠. 무죄(1심), 유죄(2심), 대법원 확정까지 부침이 심했잖아요.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울컥했어요.” 대리인단 정혜선 변호사(39·사법연수원 36기)가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피해자를 대변해 법정에 선 변호사는 정 변호사를 비롯해 모두 9명(김두나·김혜겸·문은영·서혜진·소라미·장경아·장윤정·최윤정), 이 가운데 정혜선·서혜진(38·연수원 40기)·김두나(40·변호사시험 6회)·문은영(40· 변호사시험 7회) 변호사를 11일 오후 서울 서초 정혜선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 ‘일하는 여성’ 지워버린 1심… 분노한 여성들의 연대
이 사건 1심 재판부(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피고인 안 전 지시가 아닌 피해자 김지은씨를 재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수행비서였던 김씨는 전임 비서와 같이 휴일 없이 24시간 도지사 일정을 조율·관리했다. 공적 업무는 물론, 개인 모임까지 보좌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찾으려 한 점 △안 전 지사, 통역관 부부와 함께 와인바에 동행한 점 △평소처럼 안 전 지사를 지지하는 취지로 대화를 나눈 점 등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봤다.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다’는 취지다. 김씨가 한 일은 안 전 지사 개인을 향한 연모나 사적 감정이 투영된 일로 왜곡됐고, 피해자 신문 과정에서 ‘정조’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결국 안 전 지사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재판부가 피해자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그런 식의 질문이 가능한가 싶었어요. 수행 비서는 24시간 붙어서 일해야 해요. 남성이 그 일을 수행하면 공적인 업무가 되고, 여성 비서가 하면 성애가 되는 건가요. 재판부가 여성 노동권을 정조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한 거죠.”(정혜선 변호사) 1심 결과는 분노한 여성을 연대하게 했다. 공대위 구성 단체가 132곳에서 158곳으로 확대됐고 3명(정혜선·장윤정·최윤정)이던 대리인단은 서혜진·문은영·김두나 변호사 등이 합류해 9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9월17일 공대위가 개최한 비공개 간담회가 계기가 됐다.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하는 변호인은 보통 1명이다.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공감대가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연수원 기수 등은 물론 소속 사무실도 모두 달랐다.
노무사로 일했던 문은영 변호사는 변호사 수습 기간에 대리인단에 합류했다. “노무사로 일할 때부터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관심있게 지켜봤어요. 쉽게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외부에 알린다 하더라도 고통 속에 괴롭힘 당하다 퇴사하는 사례를 많이 봤거든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문은영 변호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로 일하다 변호사 길을 걷게 된 김두나 변호사는 이 사건이 사회에 던질 메시지에 주목했다. “비장애인 성인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이 이슈가 된 적이 많이 없었어요. 꽃뱀으로 몰려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죠. 이 사건이 최종 무죄가 되면 ‘역시 비장애인 성인여성은 의심할 만하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져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어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대리해 피해자 2차가해 고소 사건을 맡은 서혜진 변호사도 자연스럽게 대리인단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은 사건 기록을 살피며 ‘도저히 무죄가 나올 수 없는 사안’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서울서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는 안 전 지사의 공소유지를 이어갔다. 대리인단은 피해자의 법률적인 조력인으로 재판을 챙기며 피해자 목소리를 대변해 의견서나 참고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공대위 활동가들은 수사·재판, 생활 지원부터 2차 피해 대응, 집회 개최 등 피해자를 보조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 상고심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안희정은 유죄다’ 등이 적힌 손팻말을 하늘을 향해 던지며 환호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업무상 위력 인정 의의… 성인지감수성이 판단의 전부 아냐
지난 2월 2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는 1시간30분 선고 내용을 읊으면서 10가지 혐의 중 9가지를 차례로 ‘유죄’라 했다. 출석하지 못한 피해자를 위해 선고 내용은 텔레그램으로 실시간 전송됐다. 법정은 울음바다가 됐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에 대한 기존 법리와 판례를 따른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판단이었다”고 서혜진 변호사는 말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판단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피해자 진술은 성폭력 범죄의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직접 증거인 피해자 진술이 일관성과 구체성을 살피게 된다. 이 사건은 피해자 진술부터 주변인 진술, 텔레그램 메시지 등 성범죄 사건치고 비교적 증거가 많은 편이었다. 검찰에서의 3차례 피해자 조사, 1심(16시간)·2심(3시간)에서의 피해자 신문 등 피해자 김지은씨 진술만 에이(A)4용지로 1천여 쪽에 달했다. 모든 증거를 종합한 2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주요 부분에서 일관되고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진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세하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가 문제 삼은 피해자의 대응은 “특정하게 정형화한 성범죄 피해자의 반응만을 정상적인 태도라 보는 편협한 관점”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반면 피고인 안 전 지사의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졌다. 안 전 지사는 피고인 신문에서 ‘연인 관계였다’, ‘교감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10가지 범죄 혐의 외에는 그 ‘교감’을 설명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방으로 부르니까 왔고 성적 접촉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 안 전 지사가 말하는 교감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가진 지위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것”이라고 정혜선 변호사는 말했다.
특히 위력을 이용한 권력형 성범죄를 법원이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대리인단은 입을 모았다. 인사권을 쥔 직장 상사는 폭행·협박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위력을 이용해 손쉽게 성폭력을 저지른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형법 303조) 혐의는 이를 벌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신고는 물론 기소율도 낮아 처벌 사례가 많지 않았다. 2016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사건이 검찰에 25건 접수됐지만, 단 한 건의 사건만 기소될 정도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유력한 대권주자이자 피해자의 임면권을 가진 안 전 지사의 지위나 권세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하다”고 보면서 “안 전 지사가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피해자를 간음 또는 추행했다”고 판단했다. 서혜진 변호사는 “위력을 이용한 성범죄는 물리력을 동반한 범죄보다 어쩌면 더 현실에 가깝다. 안 전 지사 사건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판결이다. 형법 303조의 입법 취지와 존재 의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어쩔 수 없이 회식에 참석하고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에 웃어줘야 하는 직장인들의 비애는 언론 보도나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널리 공감대를 얻는다. 그러나 그 문제가 여성 노동자와 상사와 관계로 옮겨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남녀관계, 애정관계라는 편견이 덧대어진다. “양진호씨의 ‘위디스크 사건’ 때 직원들이 무지개색으로 염색하고 활짝 웃는 사진이 공개된 적 있는데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기뻐서 저렇게 하는걸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되면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친절하게 대한 것, 업무를 열심히 한 것 모두 성적인 의미로 왜곡되서 해석돼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갑질이나 위력을 둘러싼 우리 사회 이해의 폭을 성별 권력 관계까지 확대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두나 변호사)
대법원 최종 판단으로 대리인단의 공식 활동은 종료됐다. 그러나 공대위와 함께 피해자의 최후 진술서, 재판 선고문 등을 모아 백서나 토론회를 통해 공유할 예정이다. ‘보통의 김지은들이 일궈낸 승리’를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다. 문은영 변호사는 “이 판결이 적어도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에게는 희망의 증거로, 마음대로 부하직원을 대하는 조직 내 권력자에게 사회적 경고로 남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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