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 담벼락에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서울서부지부 명의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관련자를 구속하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유신정권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 자체가 불법이므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하급심 판단이 또다시 나왔다. 긴급조치 발령 자체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여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손해배상 청구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한 ‘양승태 대법원’ 판례가 다시 한번 도전받은 모양새다.
■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고의적 불법, 반성적 고려 필요”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이동연)는 지난 6일 긴급조치 제9호 피해자 이아무개씨 등 3명, 그 유족 등 19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3억 7천여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1978년 유신정권 시절 서울대 선·후배 사이였던 이아무개씨 등은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서로 주고받았다는 혐의(긴급조치 9호 위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은 최대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이듬해 3월 확정됐다. 최장 311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고, 출소 뒤에도 지속적인 감시를 받으며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뒤 재심을 청구해 2013년 8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행위 자체가 고의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려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가 인정돼야 한다. 재판부는 당시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령행위는 △유신헌법이 정한 당초 목적과 어긋나고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며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정황을 종합했을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9호의 발령이 유신헌법이 정한 요건과 맞지 않고 이에 의해 국민들의 기본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이를 발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긴급조치 발령 행위 자체가 헌법 위반 행위로, 그에 따른 일련의 수사, 재판도 전체적으로 위법하기 때문에 국가 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다.
이는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판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그해 3월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일 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로, 국민 전체에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법적 의무를 지지는 않는다. 대통령의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재판부는 오히려 이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법원의 자성을 촉구하며 이렇게 밝혔다. “긴급조치 제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했고, 그 위헌성이 명백하다. 그 목적도 유신체제를 유지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으로 그로 인한 피해를 회복시키는 것은 국가가 지금이라도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이러한 긴급조치에 대해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거나,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대해 정치적 책임만을 질 뿐’이라는 이유로, 그에 따른 피해의 직접적인 구제에 소극적이었다. 반성적 고려가 필요한 부분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사단법인 ‘긴급조치 사람들’이 2018년 8월30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긴급조치 등 과거사 관련 헌재의 결정을 비판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국정운영 협력사례’로 포장된 긴급조치 사건, 피해자들만 발 동동
2015년 대법원 판례는 ‘국가 책임을 협소하게 봤다’. ‘40년 전 가혹행위를 어떻게 입증하냐’는 비판을 받았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사·재판을 받은 것만으로는 안 되고, 그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 다른 불법행위를 입증해야만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다. 그러나 40여년 전 수사기관에서 은밀하게 이뤄진 가혹행위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해 9월 하급심 법원도 대법원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재판장 김기영), 2016년 2월 광주지법 민사13부(재판장 마은혁)이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위법하다”고 판단하면서 대법원 판단에 반기를 들었다. 두 사건도 결국 상고심에서 국가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결론 났다. 지난해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원 판결이 나온지 얼마 안됐는데 이런 식으로 들이받는 판결이 나오는 건 문제 아니냐”며 김기영 부장판사(현 헌법재판관)에 징계 조치를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는 정황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당시 법원행정처가 2015년 긴급조치 대법원 판결을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국정운영 협력 사례’로 소개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최근 하급심에서는 재판부마다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 민사27부(재판장 임정엽)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긴급체포·구금된 김아무개씨 사건에서 “긴급조치 1호 발령 행위 자체가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6일 나온 판결과 같은 취지다. 피해자 손을 들어준 전향적 판결이지만, 아직 이례적 소수에 불과하다.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재판장 김선희)는 고 이희호 여사와 문익환 목사 유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같은 취지 소송에서 대법원 판례에 따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2015년 대법원 판례를 바로잡아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대법원 판단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별 판사들이 자신의 양심, 헌법과 법률에 따른 판결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게 중요하다. 그런 판결들이 쌓여야 대법원이 이 사건 판결을 다시 회부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에 긴조 발령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하급심 판결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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