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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노숙자들 ‘눈물의 선행’ 독거노인 돕기 나섰다

등록 2005-12-27 20:00수정 2005-12-27 20:00

27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홀몸노인에게 일당을 모은 돈으로 마련한 선물을 주고 있는 노숙인 민윤찬(46)씨 일행. 이들은 하나같이 “기사에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고 떳떳하게 살겠다. 신문에 나면 혹시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보면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김태형 기자 <A href=\"mailto:xogud555@hani.co.kr\">xogud555@hani.co.kr</A>
27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홀몸노인에게 일당을 모은 돈으로 마련한 선물을 주고 있는 노숙인 민윤찬(46)씨 일행. 이들은 하나같이 “기사에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고 떳떳하게 살겠다. 신문에 나면 혹시 누가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보면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우리도 남도울수 있을까? 나는 젊기라도 한데 팔십먹은 분들은 어떻게…206명이 보태 가가호호 방문… 팔순 할머니 글썽 “고마워, 와줘서 고마워”

좁은 골목길은 굽이굽이 언덕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 중앙시장 뒤편, 골목길을 올라가는 권오대(27)씨의 입에선 하얀 김이 연방 새나왔다. 같이 길을 나선 김정연(29)씨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파른 골목을 한참 올라간 뒤에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얼기설기 내부 구조가 다 드러날 정도로 허름한 집 안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뜻밖에도 1평 남짓한 작은 방이 전부였다. 홍도원(81) 할머니가 갑작스런 인기척에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할머니, 날씨도 추운데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에구, 방이 너무 차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보자마자 김정연씨가 놀라 할머니 건강부터 물었다. 잠시나마 할머니의 말벗이 됐던 두 남자는 가지고 온 참치 선물세트와 휴지를 할머니에게 건넸다. 이들이 떠날 때까지 홍 할머니는 “고마워. 와줘서 고마워”라며 손을 저었다.

“저도 계단 오르기가 힘든데…, 가슴이 아프네.” 골목을 내려오며 권씨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을 김씨가 거들었다. “나는 젊기라도 하니까 막말로 어디서 굴러먹어도 먹고사는데, 팔십 먹은 사람은 어떻게 해….” 이날 두 사람의 얼굴에선 온종일 뿌듯함과 쑥스러움이 교차했다.

이달 초순께였다. 어느날 저녁,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 ‘햇살보금자리’(대표 정요섭 목사)에서는 평상시처럼 노숙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지친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때마침 세밑새해를 맞아 뉴스에서 불우이웃 돕기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때 문득 누군가 말을 꺼냈다. “우리에게도 남들 한번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올까?”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하면 되지.”

정말 하면 될 것 같았다. 노숙인들은 그 자리에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남의 도움만 받다 보니 남을 돕고 싶어서라는 식의 결의는 없었다. 굳이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란 약속이 모두의 마음속에서 맺어진 듯했다. 6일부터 모금이 시작됐다. 하루 1만원 벌이로 살아가는 노숙자 206명이 돈을 보탰다. 21일까지 모은 돈은 83만3210원. 이 돈으로 내의며 휴지, 참치세트를 샀다. 그리고 영등포2동 사회복지사를 통해 홀몸노인 15명을 소개받아 노숙인 30여명이 서로 나눠 선물을 전했다.

하루 일당의 3분의 1씩 꼬박꼬박 돈을 낸 ‘최대기부자’ 권동원(58)씨는 불편한 몸에도 홀몸노인들을 찾는 일에 빠지지 않고 쫓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막상 권씨는 노인들 집 안으로는 들어가는 법이 없다. “안 들어갈래요. 뭐 큰돈 된다고. 조그만 건데 온 동네에 알리고 있는 것 같아서….” 경북 의성이 고향인 권씨는 한때 잘나가는 벽돌 기술공이었다고 한다. 요정에서 한 상에 300만원짜리 술을 마시며 돈을 쓸 정도로 벌이도 좋았는데, 92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뇌를 다치고 왼쪽 다리를 절게 되면서 결국 노숙자로 전락했다고 한다. 8개월 전 영등포역 생활을 청산하고 ‘햇살보금자리’에 들어온 그는 고물과 헌 박스를 주워다 팔며 자활을 준비하는 쉼터의 ‘독종’이다. 권씨는 아직 들러야 할 곳이 3곳이나 더 남았다며 동료를 재촉했다.

“인생 돌고 돈다는데, 50대면 아직 청춘이고. 여기 저만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열심히 살고 남들도 좀 도우면 그게 인생 잘 사는 거지 뭐.”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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