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국정원 프락치 공작사건 진상조사 결과 발표 및 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진상조사팀장 김인숙 변호사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른바 ‘국가정보원 프락치 사건’ 당사자와 시민단체가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정원 사찰 의혹 진상규명과 대공수사권 폐지를 촉구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시민단체가 모인 ‘국정원감시네트워크’와 ‘국정원 프락치 공작사건대책위원회’는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프락치 공작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정원 프락치 공작사건대책위원회는 2014년 10월부터 지난 8월까지 이른바 ‘국정원 프락치’로 활동한 ㄱ씨의 진술을 세 차례에 걸쳐 듣고, 이를 바탕으로 한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를 작성했다. 앞서 <한겨레> 보도 등을 통해 국정원이 서울의 한 대학교 단과대 학생회장 출신인 ㄱ씨에게 억대 금품을 제공하면서 시민단체 관계자 동향을 캐내고, 대화를 녹음해오라고 지시한 내용 등이 드러난 바 있다.
진상조사 결과, ㄱ씨는 국정원이 만들어 둔 시나리오대로 거짓 진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ㄱ씨는 시민사회단체 ‘통일경제포럼’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하며 5년 동안 송년회와 돌잔치, 결혼식 등 모든 모임에서 사찰 피해자 50여명과 나눈 개인적인 대화를 모두 녹음해 국정원에 제공했다. ㄱ씨는 녹음 파일을 제공하면서 국정원 경기지부에 가서 거짓 진술서를 작성했고, 그 대가로 약 1억6천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ㄱ씨는 특히 거짓 진술서를 작성할 때 항상 국정원이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국정원 직원들이 미리 확인한 녹음 파일과 영상 등을 활용해 손글씨로 진술서에 기재해야 할 내용을 한 장 정도로 요약해 주면 ㄱ씨가 이를 따라 그대로 작성하는 식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ㄱ씨에게 ‘지하혁명조직’이 있는 것처럼 허위로 진술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통일경제포럼 회원들이 2017년 5월18일부터 21일까지 다녀온 중국 단둥기행은 ‘북한공작원 접선 목적’으로 둔갑했다. ㄱ씨는 기행 마지막 날 일행 가운데 세 명이 함께 단둥역사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 중 한 명이 역사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영상을 두고 ‘한 명이 망을 보고 두 명이 북한공작원과 접선한 것’이라는 거짓 진술서를 작성했다. 해당 영상은 역사 맞은편에 숙소를 잡고 몰래 동행한 국정원 직원들이 촬영했다.
지난 2월에는 통일경제포럼 회원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답사를 갔는데, 이 답사 역시 국정원 직원들이 몰래 동행했다. 이후 실무진 미숙으로 버스 예약 등 여행 일정에 혼란이 발생한 걸 두고 ㄱ씨는 ‘북한 공작원을 만나기 위해 정보기관을 따돌리려는 목적으로 여행 일정을 자주 바꾼 것’이라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또 한 회원이 국제버스 탑승 시간이 헷갈려 외국 사이트에 접속한 기록을 두고는 ‘북한 공작원과 만나기 위해 외국 포털을 이용해 날짜를 잡았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혼란을 주었다’는 진술서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진술서는 모두 국정원에서 미리 만들어온 시나리오에 따라 작성됐다. ㄱ씨가 허위의 진술서를 작성하며 “없는 일인데 이렇게 써도 되냐”고 묻자 국정원 직원은 “불법이지만 네가 진술을 이렇게 하면 합법이 돼”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쓰고 나온 ㄱ씨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압박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며 “없는 사람을 만드는 일을 5년 가까이 하면서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고 그만두고 싶다는 말도 너무 많이 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신용대출을 받아서 도와주는 선배를 보면서 이때까지 내가 어떤 짓을 했던 건지 깨닫게 됐다”고 공익 제보 이유를 밝혔다. ㄱ씨는 “피해자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국정원감시네트워크와 국정원 프락치 공작사건대책위원회는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국정원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해왔지만, 임기가 반환점에 이른 지금까지 진전이 없다”며 "국정원의 디엔에이(DNA)는 변한 게 없다”고 규탄했다. 이들 단체는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상시 업무인 ‘대공 수사’라고 주장하지만, 민간인 사찰과 증거조작은 뗄 수 없는 관계”라며 “국회는 국정감사, 국정조사를 통해 이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 단체는 그러면서 “정보기관은 오로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국정원 개혁을 더는 미룰 수 없다”며 “대공수사권 폐지 등 국정원법 전면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