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오른쪽 둘째)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행정자문회의 임명·위촉장 수여식에서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글쎄요… 도통 생각나는 게 없네. 뭐가 있을까.”
먼저 물었는데, 질문이 돌아왔다. 2일 법관 출신 변호사 사무실에서 대법원 국감 장면이 스치는 뉴스 화면을 함께 보다 나온 얘기다. “김 대법원장 6년 임기 중에 3분의 1이 지나갔는데, 그분이 뭘 이뤘다고 봐야 할까요.” 한참 뜸을 들이던 그는 불현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검찰 수사에 협조한 거, 그거 하나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니, “근데 그것도 사법개혁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판사를 지낸 다른 변호사는 “(법원) 내부적으로 ‘고등부장 승진제’를 없앤 건 잘한 일인데, 그 거 빼고는 국민들 기억에 남을만한 게 없다. 손주들과 같이 지내려고 한남동 관저 고치는 데 십몇억 법원 예산 썼다는 기사만 (기억에) 또렷하다”며 웃었다.
2년 전 취임사에서 김 대법원장은 사법개혁을 역설했다. 다시 읽어 본 2740자 분량의 취임사엔 결의와 자신감이 넘친다.
“국민을 위한 올바른 재판이 무엇인지 고민해왔던 제가 이제 대법원장으로 새로운 소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의 대법원장 취임은 그 자체로 사법부의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좋은 재판’의 실현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필요한 개혁의 과업을 차분하고 진중하게 추진해 나가면서, 누구와도 대화하고 논의하며 경청하겠습니다. 이제 사법부의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김 대법원장은 당시 ‘필요한 개혁의 과업’으로 크게 네 가지를 꼽았다. ①성심을 다한 충실한 재판 ②전관예우의 우려 근절과 공정한 재판에 대한 법관의 책임성 강화 ③상고심 제도 개선 ④재판 중심의 사법행정 실현이다. ①과 ②가 다소 추상적인 가치와 문화를 바꾸는 장기 과제인 반면 ③과 ④는 입법으로 뒷받침돼야 할 제도 변화에 해당한다. 당연히 법원 안팎의 시선은③과 ④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쏠렸다.
③상고심 제도 개선은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불편이 문제다. 대법원까지 사건을 들고 가는 사람은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 2018년 말 기준 상고심 접수 사건은 4만7979건이나 된다. 이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신속하면서도 충실한 재판, 두 가지를 다 바란다.
그런데 상고심 재판은, 1·2심을 거치며 걸러지는데도, 대체로 오래 걸린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의 문언(제27조 3항)은 미사여구일 뿐이다. 재판이 오래 가면 무엇보다 당사자의 금전적 부담이 커진다. 변호사 비용을 빼고도, 가령 민사 2심에서 패소한 사람이 몇 년 만에 상고심에서도 패소해 판결이 확정되면 연 12%나 되는 지연이자(지연손해금)를 물게 된다. 상고심은 법원에 내는 인지대도 비싸다. 1심의 두 배를 낸다. 해마다 이렇게 거둬들이는 대법원의 상고심 인지대 수입이 오래전 200억원 대를 넘겼다. (2016년 277억원, 2017년 235억원, 2018년 201억원) 형사 피고인이 받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한 고법부장 출신 변호사는 “상고심 판단이 지체되면서 당사자들이 겪는 정신적·물적 피해가 엄청나다”며 “웬만한 의뢰인들에게는 대법원 재판의 현실을 설명해주면서 상고를 말리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재판이 충실하기라도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법원에는 하급심에 없는 ‘심리불속행(심불) 기각’이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심리를 하지 않고, 즉 사건의 내용과 당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각해 버리는 것이다. 상고 후 4개월 안에 결론이 나는 건 좋은데, 판결문은 딱 한 줄이다. 왜 기각인지 이유도 적혀 있지 않다. 형사 사건을 빼고는 이 심불 기각이 가능한데, 상황이 심각하다. 상고사건 10개 중에 8건이 심불 기각으로 끝난다. 위헌 소송이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대법원은 눈도 깜빡 안 한다.
이런 상황은 올 상반기에 더욱 나빠졌다. <한겨레>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이철희 위원(더불어민주당)을 통해 입수한 대법원 자료를 보면 ‘깡치 사건’이 증가 일로에 있다. 깡치 사건이란 여러 이유로 판결이 미뤄진 적체 사건을 뜻하는 법조계 은어다. 민사 본안의 경우 올해 6월 말 기준 1년 이상 판결 지연된 사건이 전체 8818건의 33.6%인 2965건에 이른다. 지난해 말(15.4%), 2017년 말(15.3%)보다 갑절 이상 높아졌다.
특히 적체 기간이 ‘1년 초과 2년 이내’인 사건은 2262건으로 지난해 말(732건)보다 3배 넘게 늘었다. ‘2년 초과 3년 이내’, ‘3년 초과’ 사건도 각각 512건, 191건으로 2018년 말(428건, 178건)에 견줘 눈에 띄게 증가했다.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악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심불은 줄었을까. 그렇지 않다. 민사 사건의 전체 처리 건수 대비 심불 비중은 올 상반기 72.1%로 지난해(52.2%)보다 20%포인트 가까이 높아졌다. 또 가사사건과 행정사건의 올 상반기 심불 비중도 각각 88.6%, 80.2%로, 지난해(86.4%, 79.5%)보다 높았다. 민사와 가사, 행정 세 분야의 심불 평균은 올 상반기 80.3%로 2016년 이래 가장 높다. 최악이란 뜻이다.
형사공판은 사건 절대량은 줄었지만, 질적 양상은 나빠졌다. 올 6월 말 기준 ‘3년 초과’로 묵힌 사건이 228건으로 지난해 말(139건)보다 70%가량 급증했다. 3년 초과 사건은 2016년 말 35건, 2017년 말 66건에 불과했는데, 최근 해마다 2배가량 늘어나는 추세다. 적체 기간이 ‘2년 초과 3년 이내’인 사건은 284건으로, 지난해 말(285건) 수준을 유지했고, ‘1년 이내’와 ‘2년 초과 3년 이내’는 각각 3987건, 661건으로 지난해 말(4782건, 790건)보다 줄어들었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은 분명하다. 3심을 받아보겠다고 밀려드는 사건에 비해 대법관이 턱없이 적어서 생기는 일이다. 전체 대법관 숫자는 대법원장 포함해 모두 14명이지만, 대법원장은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전합) 재판에만 재판장으로 들어가고, 법원행정처장은 아예 재판 업무에서 배제된다. 나머지 12명의 대법관이 4명씩 3개 소부를 만들어 거의 모든 사건을 심리한다.
상고사건 대부분의 ‘운명’은 대법관이 아니라 새 사건을 검토하는 ‘신건조(新件組)’ 재판 연구관에게 달렸다. 이들이 기록을 검토한 뒤 각 사건당 A4 10매 안팎의 의견을 주심 대법관에게 올린다. 의견서 표지에는 △심불 기각 △상고기각 △전속연구관 검토 △공동연구관 검토 △전합 회부 중 하나가 붙어 있다. “신건조 재판 연구관이 보고한 의견과 동일하게 처리하는 비율이 90%를 넘는다.” (박시환 전 대법관) 열의 아홉이다. 어느 전직 대법관은 사석에서 “6년 동안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사건은 2건밖에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사실상 대법관 대신 재판 연구관이 상고심을 맡은 셈이다.
같은 소부에 속한 대법관 4명은 2주에 한 번 모여 각자 100건 남짓 되는 사건의 결론을 논의-이걸 합의라고 부른다-한다. 소부 전체로 보면 400건이 넘는다. 하지만 각자 자기 사건만 들고 합의에 들어간다. 남들이 어떤 사건을 합의에 올렸는지는 당일 목록 형태로 보는 게 전부다. 대법관 네 명의 각자 사정이 같다.
돌아가며 사건당 2~3분 정도 요지와 결론을 낭독하고 약 5~10초간 ‘이의’ 제기가 없으면 합의로 간주한다. 사실상 대법관 1인의 재판이나 마찬가지지만, 판결문은 대법관 4명의 공동명의로 나간다. 상고한 당사자는 대법관들이 꼼꼼히, 충실하게 기록을 읽고 판단해주길 바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상고심 재판의 구체적 실태는 ‘법조외전
[37] 우리가 미처 몰랐던 대법원 ‘10초 재판’의 비밀’에서 상세히 다뤘다)
반면, 전합에 올라가는 사건은 극소수다.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전합 판결은 모두 12차례, 전체 대법원 판결의 0.001%에 불과했다. 전합 판결은 2016년 12건, 2017년 15건, 2018년 21건으로 조금씩 늘고 있지만, 전체 사건 대비 비율은 거의 같다.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대법관 수를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2018년 말 기준 대법관 1인당 사건 수는 3998건이다. 대법관을 지금의 10배, 120명으로 늘리면 1인당 사건 수는 10분의 1로 줄일 수 있지만, 전합에서의 토론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대법원의 위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갈피’를 잡는 일이다.
“상고심 개혁은 사법부 단위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고, 나라 전체 차원에서 사법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논의해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각 개인의 권리 구제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미국 연방대법원처럼 ‘정책 법원’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할 것인지, 우리 사회가 대법원에 요구하는 기능과 역할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 다를 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박시환 전 대법관)
김 대법원장도 같은 문제의식이 없지 않았다. 취임 1주년을 앞둔 지난해 9월20일 그는 ‘사법개혁 대국민 담화문’이란 것을 냈다. 여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법부의 근본적인 개혁은 사법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 저는 향후 상고심 제도 개선, 전관예우 논란이 계속되는 재판 제도의 투명성 확보 방안 등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법부의 근본적인 개혁 조치들에 관하여, 입법부와 행정부 및 외부 단체가 참여하는 민주적이고 추진력 있는 ‘보다 큰’ 개혁 기구의 구성 방안도 조만간 마련하여 밝히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김 대법원장이 조만간 밝히겠다던 ‘보다 큰 개혁 기구’는 제안조차 없었다. 상고심 제도 개선을 위한 어떤 논의도 가시화하지 않았다. 지난 7월24일 한국민사법학회·한국형사소송법학회 임원진, 일부 법학자들과 간담회를 열어 의견을 청취한 것이 그가 보인 행보의 전부다.
‘④재판 중심의 사법행정 실현’은, 간단히 말하면,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을 내려놓는 게 핵심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벌어진 사법농단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사법행정과 재판 업무를 명백히 분리하고, 법관에 대한 근무 평정과 승진 제도를 개혁해 일선 판사들이 더는 인사권자인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지 않게끔 하는 일이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비서실 역할을 하며 흑역사의 본산이 됐던 법원행정처 폐지가 1순위로 논의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우리 사법부가 지난 시절의 과오와 완전히 절연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 사법행정 분야에서도 ‘대법원장의 권한 내려놓기’를 통해 법원 내·외부의 다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 9월13일 사법부 70주년 기념사)
결론부터 말하면, 김 대법원장의 이 말 역시 허언으로 끝났다. 그는 지난해 12월12일 ‘사법행정제도 개선에 관한 대법원 법률개정 의견’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냈다. 여길 보면, 기존 법원행정처는 없어지고 ‘사법행정회의’가 신설된다. 이름대로 사법행정 사무를 심의·의결하는 새로운 기구다. 대법원은 “중요 사법행정 사무의 의사결정 권한을 민주적·수평적인 합의제 기구로 넘겨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 권한을 분산하고 견제”한다고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구성과 권한을 보면 기대 난망이다. 위원 11명은 대법원장 포함 현직 법관 6명, 외부 비법관 4명, 사법행정회의 결정의 집행기구인 법원사무처의 처장으로 구성된다. 이 중 상근자는 의장인 대법원장과 법원사무처장 두 사람뿐인데, 사무처장은 대법원장이 대법관 회의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돼 있다. ‘대법원장의 사람’이 지명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하면 “법원 내·외부의 다수 의사가 반영”될까. 비상임 9명, 특히 외부인사 4명은 들러리가 되기 십상이다. 대법원장이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을 법원행정처장과 차장에 앉히고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던 기존 구조와 무엇이 달라진 걸까.
법조·시민단체로부터 “개혁 후퇴”, “개악”이란 비판이 쏟아졌지만, 김 대법원장은 자화자찬으로 응대했다. “(사법행정회의 신설 등) 이는 사법부의 독립을 더욱 튼튼히 하고 사법의 관료화를 방지함으로써 사법부가 ‘좋은 재판’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될 것입니다.” (2019년 4월25일 ‘법의 날’ 치사)
김 대법원장은 취임 2주년을 맞은 지난달 26일 ‘사법행정자문회의’라는 것을 발족시켰다. 국회에서 사법행정회의 신설안이 통과될 때까지 임시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자문기구를 출범시킨 것이다. 법원조직법에 있는 대법원장의 권한과 법원행정처의 기능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이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물론 법조계의 반응은 썰렁하다.
“우리법(우리법연구회) 같이할 때 좋게 말하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스타일이었다. 뭐든지 찬찬히 살피고 신중하게. 대법원장이 되고 나서도 그 스타일 그대로인 것 같다. 우리법 회장 때는 미덕일 수 있지만, 대법원장이 돼서는 아니다. 개혁에는 타이밍이 있다. 대통령 임기와 겹치면서 힘을 받을 수 있었고,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이 터지면서 여론도 더 없이 좋지 않았나. 그런데 2년을 그냥 흘려 보냈다.” (법관 출신 변호사)
문 대통령에겐 행운이 따랐다. 만약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를 채웠다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 후임 인선은 그의 몫일 수 있었지만, ‘촛불’ 덕에 상황이 달라졌다. 문재인 청와대는 인선에 공을 많이 들였다. 일단 임명하고 나면 성에 차지 않아도 6년 동안 ‘어쩌지 못하는’ 자리여서 그만큼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애초 문 대통령은 대법원장 후보자로 1순위 전수안 전 대법관, 2순위 박시환 전 대법관을 염두에 뒀다. 조국 민정수석을 앞세워 설득하고, 통하지 않자 직접 전화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끝내 고사하면서 세 번째로 선택한 카드가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김 대법원장 지명 사실을 알리며 한껏 의미를 부여했었다. “김 후보자는 (…)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법부를 구현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봉사와 신뢰를 증진할 적임자입니다.” (2017년 8월21일 청와대 발표)
그 사이 김 대법원장은 별명 하나를 얻었다. 법조계, 특히 법관들은 그를 ‘어쩌다 대법원장,’ 줄여서 ‘어대’라고 부른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다. 문 대통령과 조국 법무부 장관은 대법원장 잘 뽑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강희철 선임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