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2월 오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의왕/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재판을 마치기 전 몇 가지 당부 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 수사와 재판을 위해 많은 국가적 자원이 투입됐습니다. 이 사건에서 밝혀진 위법행위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국민의 열망도 큽니다. 그러나 몇 가지 점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삼성그룹이 이 사건과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첫 번째 파기환송심 재판이 열린 가운데, 이 부회장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부 재판장이 이례적인 당부의 말을 쏟아냈다.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인 정준영(52·사법연수원 20기) 부장판사는 삼성 쪽에 기업 내부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하고 구시대적 재벌체제에서 탈피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부회장에게는 재판 중에도 기업 총수로서의 업무를 충실히해달라고 했다.
이날 정 부장판사는 재판 말미에 “몇 가지 당부가 있다”며 운을 뗐다. 정 부장판사는 “이 사건은 삼성그룹 총수와 최고위직 임원들이 계획하고 가담한 횡령 및 뇌물 범죄”라고 정의하면서 삼성 쪽에 실효적인 기업 내부 준법 감시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 부장판사는 “삼성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인 준법감시 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 법정에 앉아있는 피고인들뿐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서원(최순실)씨도 이 사건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이같은 범죄가 재발될 수 있다”고 했다. 정 부장판사는 준법감시제도는 고위직 임원과 기업 총수의 비리 행위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며, 미국 대기업들의 제도를 참고하라고 덧붙였다.
정 부장판사는 또한 이 사건이 “대기업 집단 재벌 총수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저지른 범죄”라고 짚으면서, 과거의 구시대적 재벌체제를 탈피해달라고 주문했다. 정 부장판사는 “모방형 경제모델로 국가 발전을 주도한 재벌체제는 과도한 경제력 집중, 일감 몰아주기, 단가 몰아치기로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고 있다. 우리 국가 경제가 혁신형 모델로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엄중한 시기에 재벌 총수는 재벌체제 폐해를 시정하고 혁신경제로 나아가는 데 기여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재벌체제를 혁신해 혁신기업 메카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경험을 참고해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정 부장판사는 피고인석에 앉은 이 부회장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 부회장은 재판부를 응시하다, 재판장이 자신을 호명하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에게 “어떤 재판 결과에도 책임을 통감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심리에 임해달라. 심리기간 중에도 당당히 기업 총수로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언급했다. 정 부장판사는 “1993년 독일·프랑스에서 당시 만 51세의 이건희 삼성그룹 총수는 낡고 썩은 관행을 모두 버리고 사업의 질을 높이자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 2019년 만 51세가 된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냐”는 질문으로 말을 마쳤다. 재판부를 응시하던 이 부회장은 별다른 발언은 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재판은 35분 만에 끝났다. 이날 9시30분께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에 도착한 이 부회장은 심경을 묻는 취재진 질문에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뇌물 인정액수가 올라가면 형량이 바뀔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등 추가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재판을 끝내고 법정을 나서면서도 이 부회장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다음 재판은 다음달 22일로, 이 부회장에 적용된 뇌물 혐의의 유·무죄를 다투게 된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