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제2금융권 업체 앞에 대출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12일 경찰은 서울 성북구 한 다세대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70대 노모와 40대 세 딸에 대해, 생활고를 겪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네 모녀가 1·2금융권에 채무가 있었고, 채무 독촉장·유서 등이 발견된 정황으로 미루어 생활고로 인해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제2금융권(은행 제외 모든 제도권 금융기관)에도 채무가 있다면, 더는 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없다. 경찰은 네 모녀가 사채를 썼는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 7월 노모와 딸은 기초연금 계좌를 압류방지 전용계좌로 바꾸기 위해 주민센터를 찾았다. 당시는 매달 꼬박꼬박 내왔던 건강보험료조차 밀리기 시작할 만큼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왜 네 모녀는 아무런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 보이지 않는 심리적 고통
채무 조정 전문가들은 네 모녀가 ‘빚 독촉’으로 인해 극심한 심리적 고통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채무 독촉장이 발견됐다는 것은, 전화·문자·방문 등을 통해 대출금을 갚으라는 연락을 두루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홍석만 주빌리은행 사무국장은 “대출금을 연체하면 하루에도 전화를 시도 때도 없이 받게 된다. 정상적 영업이나 업무가 어려워지고,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실직에 이른다”며 “과도한 채권 추심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채권추심법이 있지만, 규정이 추상적이라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 불법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금융감독원이 가이드라인을 통해 채권 추심을 위한 연락 횟수를 제한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지켜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홍 사무국장이 직접 만난 채무자들은 자존감이 떨어지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자립 의지도 크지 않았다. 돈을 구하러 다니거나 법률 상담 등을 받는 과정에서 불친절을 경험하고 ‘안된다는 답’을 자주 듣기 때문에 공공기관에 대한 불신도 크다. 네 모녀의 심리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북구청 관계자는 “지난 7월 어머님과 따님이 동 주민센터에 왔을 때 담당자가 ‘무슨 일 있으시냐’ 고 물었다. 그런데 따님이 자괴감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길 꺼렸고 실례가 될까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과도한 빚을 지게 된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신체·정신건강, 사회적 관계마저 악화한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본 정부는 자살대책 정책에서 상환능력에 견줘 과도하게 빚을 진 다중채무자 문제를 주요하게 반영하고 있다.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 센터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어떤 실패를 하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지 않고 있음을 되짚어봐야 한다고 했다. 법원의 공적 채무조정 과정에서도 채무자들을 사회적 신뢰와 윤리를 어겨 엄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여전한 상황에선 이들이 재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견줘, 갚을 능력이 없는 최빈곤층에게조차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에 대한 비난이 적은 문화도 곱씹어봐야 한다.
한 금융기관의 가계대출 상담 창구. 사진 연합뉴스
■ ‘임시 처방’ 긴급복지 지원받는다 해도…
보건복지부는 극한 위기를 맞은 저소득층에 생계·의료비 등을 제공하는 긴급복지지원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최후 안전망인 기초생활보장제도 사각지대가 넓고, 수급 여부 판단까지 시간이 걸리는 까닭에 한시적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네 모녀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복지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다. 긴급복지지원법상 지원 가능한 위기 상황인 ‘휴·폐업, 사업장 화재 등으로 인한 영업 곤란’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형 긴급복지지원을 통해 생활고 확인을 거쳐 생계비 등을 받을 수 있다. 살고 있는 지자체 재정 여력이나 담당 공무원에 따라 비슷한 상황이라도 긴급복지지원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렵사리 지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빚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도무지 빚 갚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가 금융기관과의 사적 채무조정(신속채무조정·프리워크아웃·개인워크아웃), 법원의 공적 채무조정(개인파산·회생)을 신청해야 한다. 주민센터에선 이러한 절차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다만,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자체는 금융복지상담센터를 개설해 재무상담 및 채무조정, 복지 연계 등을 도와주고 있다. 네 모녀가 이러한 기관에 찾아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 부채 문제 빠진 옛날식 복지
지난해 성남시 금융복지상담센터에서 채무조정 등 상담을 받은 1321명의 월 소득은 벌이가 없거나(33.6%) 100만원 미만(23.5%), 200만원 미만(22.6%) 순이었다. 10명 중 5명은 월 소득이 100만원 미만이었으나, 복지 지원을 받는 경우는 4명 중 1명에 그쳤다. 채무조정 과정에서 복지가 유기적으로 연계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다.
강명수 성남시 금융복지상담센터장은 “동 주민센터를 통해 주거지나 긴급복지지원 등을 알아보지만 연결이 수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박정만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장도 “복지 연계 10건을 시도하면 2~3건 성사되는 수준”이라며 “정부가 서민금융정책을 통해 금융 취약계층에게 대출을 해주는데, 빚이 아닌 복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빚 문제와 경제적 위기로 인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는 비극을 막기 위해선 과다채무 예방·채무 조정 등 금융정책뿐 아니라 복지·일자리, 심리적 문제까지 아우르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또 복잡한 사회보장 제도를 단순화해 접근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박정민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한해 이혼 건수(2018년 10만8700건)보다 법원에 개인회생·파산 신청 건수(2018년 13만4천여건)가 더 많을 정도로 과중 채무는 광범위한 문제”라며 “가구 소득과 자산 분석을 바탕으로 복지정책을 세웠는데 가계부채까지 고려해야 큰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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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무 문제와 관련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개인회생·파산종합지원센터(국번없이 132), 신용회복위원회(1600-5500), 주빌리은행(1661-9736),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1644-0120), 성남시 금융복지상담센터(031-755-2577) 등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