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매일 그 학생을 보고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게…”
전남대의 한 대학원에 다니는 여성 ㄱ씨는 지난 1년 가까이 하루도 맘 편히 잠든 적이 없다. 지난해 12월 교수들이 연 술자리 뒤 ㄱ씨는 같은 과 학생 ㄴ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 뒤 학교에서 ㄴ씨의 뒷모습만 봐도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ㄱ씨는 19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추행 당한 순간의 기억을 지울 수 없어 그를 마주치는 게 두려웠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ㄴ씨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붓게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지만 초·중·고교나 직장과 달리 대학 내 학생 간 성폭력은 가해자에게서 피해자를 분리·보호할 법규가 없어 피해자들이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학교폭력예방법’ 제16조에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는 피해 학생의 보호를 위해 학급교체 등을 학교장에게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어 초·중·고교생의 경우 성폭력 피해가 생겼을 때 가해 학생을 강제로 분리할 수 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역시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에 따라 ‘근무장소의 변경, 유급휴가’ 등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 내 학생 간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 즉각 분리 등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 규정이 미비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폭력 사건에 대한 후속 조처는 학교 쪽의 의지에 달린 실정이다. ㄱ씨의 경우 피해 진술의 진실성이 상당 부분 인정돼 전남대 인권센터가 지난 4월 학교 쪽에 성추행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요청했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ㄴ씨가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학교 쪽의 선택지는 좁아졌다. ‘ㄴ씨와 분리해달라’는 ㄱ씨의 요청에 학교 쪽의 대처는 ‘ㄱ씨를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ㄴ씨에게 경고하거나 두 사람의 자리를 멀찍이 배치하는 선에 그쳤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대처가 비교적 민첩하게 이뤄진 대학들도 있다. 최근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일어난 서울의 한 국립대학은 피해 신고가 접수된 직후 가해자·피해자가 강의실과 기숙사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을 달리하고, 강사를 추가로 고용해 강의를 분반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학도 한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다른 사람은 계단을 이용하게 하는 등 동선을 구체적으로 분리하거나, 피해 학생이 원하는 경우 교내에서 함께 이동하며 지원할 학생을 정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보호 조처를 하고 있다. 해당 대학들은 교내 규정에 성폭력 피해자 보호방안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피해 학생 보호를 학교 쪽의 재량과 의지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정애 인천대 인권센터 객원상담사는 “대학 평가에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지원체계를 평가 지표로 넣는 등의 방식으로 교육부가 대학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고려대 인권센터 자문위원인 박찬성 변호사는 “사실관계 확정 전 단계에서도 피해 신고자에 대해 임시적 보호 조처를 할 수 있는 법률상의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 개정 전에라도 교육부 차원에서 훈령이나 고시 등으로 상세한 지침을 대학에 제시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성희롱, 성폭력 관련 상황별로 대학 대응 매뉴얼을 올해 안에 수정해 내년 신학기 전에 배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