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이산가족은 민족의 아픔” “우린 냉전 희생양”

등록 2005-12-30 17:18수정 2005-12-30 17:18

김영식씨
김영식씨
장기수 출신 김영식씨 남북자 가족 최우영씨 편지로 껴안다
북녘의 딸과 아버지 그리는 두사람
“얼마나 괴로울까” “목도리 사놨는데”

“11월23일 임진각 소나무에 아버지의 귀환을 비는 염원을 담은 노란 손수건을 매다는 것을 보니, 나도 두살짜리 어린 딸을 떼어놓고 간 생각이 나, 내가 북에 두고 온 딸의 모습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지난 12월7일 <한겨레>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북한 연락원 출신 장기수였던 김영식(72)씨가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 최우영(35)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는 “11월8일 동진호 선원 정일남씨가 18년 만에 자기 부인, 아들과 함께 남쪽의 어머님을 금강산에서 만나는 신문 보도를 보고 최우영 선생에게 답신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로 시작됐다. “최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 잊어먹어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만날까 오떠게 하면 오시게 할까 하고 바쁘고 심적으로 괴로운 일을 하고 있는데 체면없는 사람들은 최우영 선생이 말한 것처럼 ‘이쪽에서 당기고 저쪽에서 당기고 하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최우영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사무실 뒤편 공원에서 장기수였던 김영식씨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이종근 기자 <A href=\"mailto:root2@hani.co.kr\">root2@hani.co.kr</A>
최우영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사무실 뒤편 공원에서 장기수였던 김영식씨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는 최씨에게 편지를 전했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 다리를 놓았다.

최씨는 많이 주저했지만 김씨에게 딸이 있다는 대목에 끌려 어렵게 만날 결심을 했다. “이념을 떠나서 제 아버지가 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분도 딸을 그리워하실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찡했어요.”

그러나 결국 최씨와 김씨는 만나지 못했다. 분단 60년의 세월만큼이나 높은 장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장기수의 처지에서 납북자 가족과의 만남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망설이던 김씨가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알려왔다. 다른 장기수들에게도, 다른 납북자 가족들에게도 둘의 만남은 적잖은 부담이 될 수도 있었다.

장기수 출신과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다. 최씨 어머니는 1993년 이인모씨를 만나서 “남편인 납북된 동진호 어로장 최종석씨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최씨 자신도 2000년 장기수 김인수씨를 만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최씨가 김씨를 만날 수 있었다면 4번째 만남이 될 수도 있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들이지만, 분명한 점은 둘 모두 냉전시대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편지에서 “우리 모두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여의고 처자와 딸을 그리워하는 헤어진 이산가족의 아픔에 시달려 온 것은 개인의 운명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은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최씨도 “북에 가야 할 사람은 가고, 북에서 올 사람은 와야 합니다. 우리는 냉전시대의 희생양입니다. 올 사람 오고 갈 사람 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통일의 상징이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단을 내려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김씨와 만나면 전해주려고 가죽장갑과 목도리를 샀다. 겨울이면 찬바람이 몰아치던 1월에 끌려간 아버지가 더욱 생각나기 때문이다. 최씨는 “겨울에 만난다는 것이 더 마음이 끌렸어요”라고 했다. 또 김씨가 자신을 만나러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 이해가 간다”고 했다. “복잡한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저도 처음에 만나는 것을 주저했잖아요. 이념을 떠나서 가족을 만나자고 하는데 장애물이 너무 많네요.”
“이산가족은 민족의 아픔” “우린 냉전 희생양” 장기수 출신 김영식씨, 납북자 가족 최우영씨
“이산가족은 민족의 아픔” “우린 냉전 희생양” 장기수 출신 김영식씨, 납북자 가족 최우영씨

최씨는 올겨울이 유난히 춥다고 했다. 올해만큼은 꼭 아버지가 오시리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새해에는 사람들이 ‘내가 가족들과 헤어졌으면, 납치됐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인간의 자연스런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장기수 할어버지들에게 서운한 것은 없어요. 저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격려해 주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모두 서로 만나는 날이 새해에는 꼭 왔으면 합니다.”이유진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함께 상의하려했는데” 울먹

김영식씨 ‘냉전 벽’에 무산된 만남 아쉬움 토로

“새해에는 모든 뜻이 다 잘 이루어져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최선생 미안합니다. 나는 일제 때 조선글을 못 배워 현재도 글을 제대로 못 쓰니 넓리 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영식(72)씨는 전향 장기수다. 남에게 얻어입는 ‘단벌 신사’인 그가 며칠 전, 생전 처음으로 새옷 한 벌을 사 입었다. 최우영씨에게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난 12월29일 <한겨레>가 주선한 약속 시간을 코앞에 두고 그는 “미안합니다. 다음 기회에 만납시다”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담긴 회한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같은 처지 위로도 하고, 어떡하면 우리가 멋지게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할까 상의하려고도 했는데 ….”

1962년 공작원 안내선 선원으로 남으로 내려온 그는 젊은 시절 26년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냈지만 전향했다는 이유로 2000년 송환 대상자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다. 복역 10년 만에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서를 썼고, ‘나는 버러지가 됐다’는 번민에 시달리며 2001년 고문 전향을 폭로했다. 최근 비전향 장기수 묘역 훼손 사건이 있고 나서는 집 안팎을 기웃거리는 이들이 늘어,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는 분단의 피해자로 남은 이들을 불행의 늪으로 몰아넣은 ‘민족의 운명’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헤어진 아버지를 기다리며 노란 손수건을 다는 최씨의 모습은 두고온 딸의 모습 같았다. 살아 있다면 45살이 됐을, 하나뿐인 피붙이다. 김씨는 특히 최씨를 가운데 두고 진보·보수진영이 세싸움을 하는 걸 보고 “마음이 너무 답답하다”고 했다. “맘은 너무 만나고 싶은데 …. 부디 몸 건강을 바랍니다.” 끝내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