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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망한다” 지역 청년들, 체념하지만…

등록 2019-12-02 05:00수정 2019-12-07 10:24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①지역·학벌 차별
공공연히 ‘편입하라’는 지역 대학 교수들
지역 대학생 절반 이상 “떠나고 싶다”
일터까지 이어진 ‘무시·차별·고립’
대학 이름 대신 ‘자신의 꿈’ 좇아
열악한 현실서 ‘미래’ 키우기도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영국 하원 회의장 바닥에는 붉은 ‘검선’(칼금)이 두 줄 그어져 있다. 마주 앉은 여야 의원들이 논쟁하다 칼을 꺼내 들고 서로를 찌르지 못하도록 그어놓은 선이다.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는 영국 의회의 상징이다. 경남 김해의 스물두살 대학생 조지훈이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런 치열한 정치를 한국에서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조지훈이 먼저 배운 것은 자조였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 조지훈이 다니는 김해의 한 대학 교수들은 조만간 서울에서 거리가 먼 대학부터 하나씩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훈은 그저 부모의 부모의 부모가 터를 잡은 김해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대학에 다닐 뿐인데, 주변에선 그 두 가지 사실로 조지훈에 대한 평가를 간단히 끝낸다. 조지훈은 미래를 계산할 때마다 “밀린 빨래를 몰아서 하듯 암담하다”고 했다. “저희 과에서 잘 풀리면 은행에 취업하는 거예요. 보통 취직한 선배들을 보면 월급이 180만~250만원 정도죠. 250만원 넘게 받는 직업을 가지는 건 굉장히 힘들 테고…. 저야 돈과는 거리가 있는 직업을 선택할 것 같은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부모는 조지훈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이혼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이혼 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어머니가 그 빚을 떠안았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시전형을 마친 뒤부터 편의점, 패밀리레스토랑, 화학공장, 호텔, 삼겹살집 등에서 쉬지 않고 일했다. 지금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주일에 3~4일, 하루 5~6시간씩 일한다. 그에게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물었다. “그런 말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만주가 우리 땅이라는 말처럼 의미 없어요. 몸은 굉장히 피곤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죠.”

조지훈은 자신을 “주류 밖의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스펙 품앗이’ 의혹 이후 불거진 대립에서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었다. “조 전 장관 가족에도 동의가 안 됐지만,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도 동의가 안 됐어요. 게다가 동양대에서 조 전 장관 딸에게 표창장 준 것이 입시에 도움이 됐겠냐는 말도 나왔는데, 그 말은 지역 대학을 비하하는 의도가 숨어 있는 거잖아요. 이 뿌리 깊은 학벌주의가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신 3~4등급이었던 조지훈이 지역 사립대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공정이지, 대학 이름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공정은 아니잖아요.”

조지훈의 현실은 그의 신념을 억누르고 있다. “친구들이 편입해서 서울로 가라는 말을 계속해요. 그런데 다 서울로 가면 지역은 어떻게 해요? 나 같은 사람이 노력해서 살 만한 동네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속 편입을 권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황이 왔어요.”

<한겨레>가 만난 수도권 외 지역 대학생들 47명 가운데 절반 이상인 26명(55%)은 자기가 사는 지역을 떠나고 싶어 했다. 수도권에서 전문대나 4년제 대학에 다니는 36명 가운데 8명(22%)이 지금 사는 지역을 떠나고 싶다고 답한 것보다 2.5배 많다. 다수의 지역 대학생은 조지훈의 친구들처럼 ‘편입’을 각자도생의 출구로 여기고 있었다. 지역 대학생들은 떠나고 싶은 이유를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구의 한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스물한살 강은비(가명)는 “취직할 기업이 많지 않아서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엔 배울 수 있는 환경도 마땅치 않다. 경북의 한 대학을 졸업한 스물다섯살 김태광은 배우가 꿈이었다. 하지만 고향인 창원이나 학교가 있는 경북에는 연기를 배울 곳이 없었다. 그는 2016년 12월 서울에 가 된장찌개집에서 서빙 알바 등을 하며 청담동 연기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생활비와 학원비 스트레스로 우울증 진단을 받고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그는 연기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어 연기 선생님을 찾아주는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앱)을 작동시켰다. 서울에서는 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연기 선생님을 구할 수 있었는데, 창원에선 가장 가까운 선생님이 50㎞ 가까이 떨어진 부산에 있었다. 만날 수 있는 친구들조차 나뉘었다. “서울에는 취미와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고향에는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만 남아 있더라고요.”

차별과 고립을 느끼는 것은 서울 밖 대학생들뿐 아니다. 전문대 학생들도 같은 처지다. 고등교육법 47조에는 전문대학의 목적이 “전문직업인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28조)하는 ‘대학’과 다른 고유한 역할이 있다. 하지만 서열에 집착하는 사회는 설립 목적이 다른 전문대를 맨 아랫자리에 가져다놨다. 전남의 한 전문대를 나와 같은 지역 종합병원에서 의료기사로 일하는 스물세살 공민정(가명)에겐 상처가 있다. 그는 서울의 ㄱ대학병원에서 실습을 했다. 하루는 친한 실습생들과 간 맥줏집에서 다른 실습생들과 마주쳤다. 공민정의 일행은 모두 지역 전문대 출신이었고, 마주친 이들은 모두 ㄱ대학 출신이었다. 나중에야 실습 강사가 ㄱ대학 출신만 따로 모아 만든 술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차별은 일터까지 이어졌다. “4년제 대학을 나와서 우리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왜 굳이 우리 병원에서 일해요? 더 좋은 곳으로 가요’라고 말해요. 그런데 전문대 출신에겐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은근히 무시하죠.”

<한겨레>는 대학생 83명에게 학교생활 만족도(10점 만점 기준)를 물었다. 그 결과 서울의 대학생은 평균 7.5점, 지역 대학생은 6.8점, 전문대 학생은 5.3점을 매겼다. 수도권의 한 전문대에 다니는 스무살 김수정(가명)은 학교생활 만족도에 2점을 줬다. 학교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업의 질은 낮았고, 학교 돈을 빼돌리는 교수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수들마저 “너희는 세탁(편입)을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달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10’이라고 답했다. “출신 학교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물어보는 것도 ‘어느 학교 나왔냐’잖아요.”

남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지난 10월23일 오후 충남 천안에 있는 남서울대 아동복지학관 강의실에서 &lt;한겨레&gt;의 ‘한국에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기획 관련 심층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남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지난 10월23일 오후 충남 천안에 있는 남서울대 아동복지학관 강의실에서 <한겨레>의 ‘한국에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기획 관련 심층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국 청년이 만약 100명이라면’ 19~23살 청년 가운데 전문대학에 다니거나 서울 외 지역에서 대학에 다니는 사람은 67명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을 다수라거나 주류라고 느끼지 않았다.

지역의 청년들은 꼭 자신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의 삶에서도 자신의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질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다. 마산대 호텔관광바리스타과에 다니는 열아홉살 신명관이 그런 경우다. 신명관은 학교생활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8’이라고 적었다. 중학교 때 핸드드립과 사이펀 커피를 내리는 법을 알게 된 뒤 그는 전문 직업인인 바리스타를 꿈꾸기 시작했다. “오직 여기 입학하기 위해서 공부했어요.” 아직 1학년이지만 그는 이미 바리스타 1·2급 자격증과 트레이너 자격증을 땄다. 외국 호텔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싶다는 신명관의 표정은 인터뷰 내내 밝았다. 경기도의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스물한살 채유리(가명)는 중학교를 대안학교에서 다니다 음악을 하고 싶어 자퇴했다. 그러다 “대학은 다녀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재수학원을 거쳐 지금 다니는 대학에 입학했다. 채유리는 학교생활 만족도를 ‘10점 만점’이라고 했다. “학교에 안 다니다가 다녀보니까 뭔가를 배우는 것 자체가 즐겁더라고요. 누군가가 제 생각을 물어보는 것도 처음이고, 그 과정에서 제 발전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가 처한 현실 역시 여러 청년들처럼 녹록지는 않다. “한 달에 50만원으로 살고 있어요. 각박한 삶이죠. 주변에 취업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고요. 그래도 나이를 더 먹으면 저도 발전하고 그렇다면 사회에서 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일종의 체념일지도 모른다. 인천의 한 전문대에 다니는 스무살 민서라(가명)는 학교 환경이 열악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미래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건 같은 전문대생 김수정과 마찬가지지만, 그는 취업 이후만 생각하며 현실을 잊고 있다. “인간관계를 제외하면 학교에서 만족하는 것은 없어요. 왜 듣는지 모르겠는 수업도 많고요. 하지만 취직을 하면 저한테 쌓이는 것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대기업에 바로 가진 못하겠지만 그 아래 단계에서 경력을 쌓다 보면 다양한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 해요. 영업이나 마케팅 전략을 짤 수 있는 중소·중견 기업을 알아보고 있어요.”

<한겨레>가 만난 서울 외 사립대 학생 29명 가운데 대기업을 꿈꾸는 사람은 단 2명이었다. 9명은 중소기업 취업을 희망했다. 전문대 학생 28명 중에도 대기업 입사를 원한 사람은 2명뿐이었다. 중소기업에 가길 바란다는 전문대 학생은 11명이었다. 지역 국립대 학생 10명 중에선 3명이 대기업 취업을 원했다. 반면 서울지역 대학생 16명 가운데 중소기업에 가고 싶다고 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절반인 8명이 대기업 입사를 꿈꿨다. 이는 차별이 고착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체념 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좀더 나은 미래로 만들어가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국 하원의 검선이 좌우를 나눈다면, 서울의 경계와 ‘4년제’ 문턱은 한국 청년들을 위아래로 가른다. 한국 사회는 생애 매 순간 “너희는 그 선을 왜 넘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고착화한 차별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건 매 순간 시험하는 사회가 아니라 평등한 삶을 위해 청년들을 지원하는 사회일 것이다.

김윤주 김혜윤 강재구 서혜미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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