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8일 민간 정책연구소 랩2050(대표 이원재)은 서울 대학로 공공그라운드에서 ‘국민기본소득제 연구결과 보고회’를 열어 “전 국민 월 30만원 기본소득 지급이 2년 안에 가능하다”고 밝혔다. 랩2050 제공
▶ “전 국민 월 30만원 기본소득 지급…2년 안에 가능하다.” 민간 정책연구소 랩2050이 지난 10월28일 발표한 ‘국민기본소득제’가 ‘새로운 세금 신설 없이 기존 세금제도를 손질’해 ‘2년 뒤에 바로 가능’한 기본소득 모델을 제시해 이목을 끌고 있다. 국민기본소득제는 기본소득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이 정책은 어떤 취지로 만들어졌을까. 공동 연구자가 직접 설명에 나섰다.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흐름이 있다. 몇몇 예외적인 국가들도 있지만, 지구 전반적으로 소득불평등이 심화하고 있고, 기계와 인공지능이 점점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아울러 환경의 지속 가능성은 이전보다 더 위협받고 있다. 한국 사회로만 좁히면,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편중이 심해지고 있고, 복지의 사각지대가 사라지지 않아 굶어 죽거나 생계 문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여전하다. 경제는 완연한 저성장의 국면에 들어섰고, 생산가능인구는 이미 줄고 있다. 태어나는 사람들이 확연히 줄었는데도 미래 일자리 전망은 밝지 않다. 일자리가 더 줄어들 거라는 예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대응책으로 부상하는 제도가 ‘보편적 기본소득제’(UBI·Universal Basic Income)다.
이 제도가 해법인지 아직 검증되지 않았고 여러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제도에 대한 찬반 구도가 이전과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본소득제를 찬성하는 쪽은 진보주의자를 비롯해 생태주의자, 보수 정치인과 기업가까지 폭넓게 구성돼 있다. 반대론자들의 구성도 다양하긴 마찬가지다. 진보·보수의 구도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어젠다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전선에 선 사람들이 한참을 토론하고 논의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는 질문이 있다. ‘무슨 돈으로 기본소득을 줄 것인가?’이다. 그리고 랩2050은 지난 10월28일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국민기본소득제’를 발표했다.
이를 설명하기 전에 기본소득부터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개인 단위로 자산 심사나 노동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현금’(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정의)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젠다가 아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누리집을 보면,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출간한 <유토피아>에서 최초의 기본소득 구상을 찾고 있다. 그 이후 미국 건국기의 정치가 토머스 페인(1796년), 마틴 루서 킹 목사(1967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1969년)도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지역 단위에선 미국 알래스카주가 1982년부터 석유 판매수익 일부를 거주민들에게 분배하는 ‘영구기금배당금’을 운영했고, 최근엔 핀란드 정부가 실업부조 수혜자 일부를 상대로 기본소득 지급 실험을 진행했다. 기술 변화의 흐름을 가장 빨리 포착하는 실리콘밸리에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등 최고경영자들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에서도 기본소득이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앤드루 양은 ‘자유배당금’이란 이름으로 모든 국민에게 월 1000달러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중앙정부가 전면적으로 실시한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단위에서 기본소득제를 실시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재원 모델이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 모델이 전국 단위 선거를 통해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아직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사례가 없었다. 국민기본소득제는 이 두 가지를 충족하려는 시도다. 국민기본소득제를 이해하는 열쇳말은 세 가지다.
첫째 열쇳말 ‘재원 모델’
국민기본소득제의 첫번째 특징은 ‘재원 모델’이라는 점이다. 기본소득이 ‘복지국가’와 같은 커다란 패러다임이라면, 국민기본소득제는 ‘복지정책’처럼 기본소득을 구체적으로 정책화한 것이다.
기본소득이 실제로 시행되기 전에 여러 특징을 가진 재원 모델이 등장해 경쟁하며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에선 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가 기본소득 재원 모델 연구를 주도해 여러 차례 발표한 바 있다. 가장 최근 내놓은 <기본소득 경제학>에는 ‘시민소득세’를 신설해 가계소득에 10%의 고정 세율로 세금을 매겨 106조원을 확보하고, 토지자산에 0.55%의 세율을 적용하는 ‘토지보유세’, 환경에 부담을 주는 활동에 과세하는 ‘환경세’로 각각 30조원씩을 확보하는 방안 등이 제시돼 있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앤드루 양은 부가가치세를 인상하고, 푸드 스탬프(저소득층 식료품 지원 정책) 등의 복지를 대체하는 재원 모델을 제시했다. 이처럼 다양한 재원 모델이 나올 수 있다.
국민기본소득제의 핵심은 ‘당장 실행 가능한 모델’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세금 제도를 신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 다수의 의사로 기본소득제가 시행돼야 하기에, 전국 단위 선거 이듬해인 2021년, 2023년, 2028년 등 3개 연도에 2개씩 총 6개의 기본소득 모델을 제시했다. 지급액 기준으로 최소안은 월 30만원안(2021년)이고, 최대안은 월 65만원안(2028년)이다. 국민기본소득제는 최소 187조원~최대 405조원의 재원 마련 방안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국민기본소득제를 발표한 뒤 많이 받은 질문이 왜 환경·토지 등 누구도 만들지 않았거나, 플랫폼 등 모두가 기여해 만들어진 것에서 재원을 마련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실현 가능성’을 최우선에 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 확보할 수 있는 정당한 재원 모델을 배척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그런 논의에 마중물 구실을 했으면 했다.
2017년 9월25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의사당에서 열린 제17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 <한겨레> 자료사진
둘째 열쇳말 ‘새로운 정치의 시작’
다소 거창한 의미 부여일 수 있지만, 국민기본소득제는 새로운 정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치란 결국 누군가를 대변하는 것인데, 정당과 정치인은 자신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명확히 표현하지 않는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어느 정당과 어떤 정치인이 명확하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를 알기 어렵다. 가난한 유권자가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현상도 이러한 정치 풍토와 문화 탓이다. 이런 정치 문화를 바꾸려면,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한지가 명확한 정책으로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국민기본소득제는 유불리가 명확한 정책이다. 2021년 기준 연소득이 4700만원 이하(세전)인 사람은 이득을 얻고, 그보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손해를 입도록 설계됐다. 과거의 소득자료를 통해 2021년의 미래 소득을 추정한 결과, 연소득 4700만원 이상인 소득자는 600만명 수준이다. 하지만 이들도 모두 손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부양하는 가구원이 많을수록 이득을 얻는 이가 늘어난다. 연소득으로 2인 가구가 9400만원, 3인 가구가 1억4100만원, 4인 가구가 1억8800만원 이상 벌지 않는다면 국민기본소득제로 이득을 얻는다. 이 기준으로 보면 국민기본소득제로 인해 손해를 입는 가구는 최상위 소득계층 일부로 한정된다. 이들의 경제력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선거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다. 만일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이해에 맞게 투표한다면 국민기본소득제는 정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물론 이런 고민이 있을 수 있다. 기본소득이 자신에게 이득을 주어도, 일을 안 하려는 사람이 늘거나 일할 의욕이 떨어지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국민기본소득제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에도 고려할 만한 요소가 많다. 일단 국민기본소득제는 최저 수준의 소득계층에겐 오히려 일할 의욕을 높인다. 북유럽 복지국가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복지 함정’은, 복지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소득이 생길 경우 그만큼 복지 급여가 삭감되면서 노동을 기피하는 현상이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이 복지 함정을 없애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기본소득은 일하는 만큼 ‘추가 소득’이 생기기 때문에 애초에 복지 함정이 없다.
하지만 고소득층은 일한 만큼 세금을 더 내기 때문에 분명 노동 의욕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선 최근 미국의 논의를 참고할 만하다.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최고 세율이 70%에 이르는 세제 개혁을 주장하고 있고,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과거 이 세율이 적용됐을 때 경제성장률이 낮지 않았다며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주장을 뒷밤침하고 있다. 랩2050은 국민기본소득제를 발표하면서 기본소득으로 인한 재분배의 변화가 사회 전반의 소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의실험한 결과를 함께 공개했다. 이승주 성공회대 협동조합경영학과 연구교수가 수행한 이 연구를 보면, 국민기본소득제가 시행되면 사회 전반의 총소비가 증가한다. 일부 소득계층의 근로 유인이 줄어들 순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소비가 늘어 내수가 증대돼 전체 경제에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열쇳말 ‘개혁 패키지’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법적으론 이미 폐지됐어야 할 제도지만 효력이 끝나는 시점에 국회가 매번 연장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평가가 끝난 정책이다. 세수 투명화에 기여했지만 고소득층이 혜택을 많이 받아 조세제도의 누진성에 역행하는 제도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눈치를 보느라 이 제도를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유권자의 불만은 당연하다. 많든 적든 소득공제로 돌려받는 돈은 분명한 데 반해, 세금을 더 내더라도 자신이 이득을 얻을 가능성은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소득세제에는 신용카드 소득공제처럼 많이 버는 사람이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누진성’을 훼손시키는 비과세·감면 제도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을 정리하고, 본래의 원칙대로 세금제도의 누진성을 회복하는 조처를 취하는 정치인은 찾기 어렵다. ‘혈세’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세금은 고통스럽고, 세금이 잘 쓰일 거라는 신뢰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과세·감면 제도를 걷어내 세금제도의 누진성을 회복하고, 그렇게 확보한 재원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준다면 어떨까. 그나마 필요한 개혁이 달성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국민기본소득제는 이미 필요한 개혁들을 한꺼번에 추진하는 ‘패키지 정책’이다.
정부 재정이 쓰이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도 필요하다. 정부 재정은 2017년 400조5천억원에서 2020년 512조3천억원으로 3년간 111조8천억원이 증가했다. 미래에도 재정이 상당 수준 늘어날 것이기에 더 늦기 전에 기존 쓰임새가 적절한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2018년 기준 스포츠토토와 로또의 판매액은 각각 4조7천억원, 3조9천억원에 이른다. 이 판매액의 상당분은 국민체육진흥기금의 사업 수익이 되고, 또 상당분은 쓰임새가 마땅치 않아 공공자금관리기금이나 금융기관에 맡겨진다. 공공재인 주파수의 매각 대금도 방송통신발전기금과 정보통신진흥기금으로 이전된다. 이 기금이 쓰이는 사업들이 다른 재정 사업과 주머니를 달리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을까? 도로 증설에 사용되는 교통시설특별회계는 2018년에만 공공자금관리기금에 7조3천억원을 예탁했다. 이전만큼 도로를 더 지을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100조원, 200조원의 재정이 늘어도 쓰던 대로 계속 쓸 것인가? 국민기본소득제는 이런 문제제기와 대안을 담고 있다.
윤형중 랩2050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