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인하대 국문학 교수
삶의 속살 포섭 못한 ‘진보담론’ 위기 불러
구체적 정책담론 생산·소통 절실
김명인 교수 발제문 요지 진보세력 또는 진보담론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은 이제 하나의 진부한 레토릭이 돼버렸다. 다시 말해 위기로서의 의미조차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게 됐다. 민주화라는 제한된 성취는 오히려 진보세력과 진보담론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 일부는 자유주의적 현실권력에 참여했고, 일부는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일부는 우경화, 보수화했고, 일부는 전통적 ‘운동권’에 잔류하고, 일부는 비판적 관조주의에 침잠해 있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급속하고 강력하게 추진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은 ‘87년 체제’의 취약성과 한계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의제들은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속에서 하나하나 폐기처분되고 있다. 극단적 시장주의의 흐름 속에서 자본의 신성불가침성이 재확립되고, 노동계급은 유연화라는 명분 속에서 자본에 하염없이 종속되어 가고, 공동체적 연대성을 비롯한 민주적 가치들이 허무주의적으로 희화화되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야만적 시장논리의 절대화 앞에서 공동체사회의 비전이나 대안이 인식이 공동화되고 있다. 이런 불행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그 어떤 희망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대한 이른바 ‘진보세력’들의 정체성 혼란과 현실대응력의 빈곤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진보적 지식인 사회부터 철저한 자기반성을 거쳐 이러한 불행과 고통에 대한 구체적 진단과 처방을 마련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담론·실천의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높은 추상수준과 낮은 현실적응성을 특징으로 하는 담론생산의 상아탑을 벗어나 구체적인 대안적 정책담론들을 생산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통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악조건 속에서도 성장해 온 남한사회의 민주적 역량과 결합하여 세상을 구체적으로 바꾸어나가는 실천궁행의 자세가 더없이 소중하게 요구된다.
김호기=그람시가 일찍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죽어가는 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위기의 징후가 우리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진보라면 새로운 것에 대한 구체적 안들을 제시해야 되는데, 국민들의 시선에서는 이런 게 잘 보이지 않는다. 위기를 검토할 경우, 담론과 세력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진보를 이야기할 때도 진보담론과 진보세력으로 나눠 봐야 한다.
진보세력은 사실 위기라고 보기 어렵다. 중도적 개혁세력까지 포함하면 87년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개혁세력을 포함하지 않을 경우, 민주노동당 및 연관세력은 사실상 신생 세력이다. 결국 진보세력은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위기는 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담론의 위기다. 과거의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담론의 위기다.
이와 연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진보세력의 문제가 담론과 세력간의 부적응 관계라는 것이다. 담론은 위기인 것에 반해 세력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민주노총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전체 이익을 대표할 수 있도록 오히려 그 영향력이 강화돼야 한다. 자본과 노동의 세력균형에서 여전히 노동이 취약하다. 문제는 민주노총이 제시하는 대안이 국민들이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담론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런 담론의 위기가 앞으로 세력의 위기로 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진보 담론이 87년 이후 민주화에 대해서는 풍부하게 논의해 왔지만, 97년 이후 세계화에 대한 논의에는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진보 세력에게는 두 개의 분기점이 있다. 첫 번째 분기점은 87년 민주화 운동이다.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돼 왔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발전국가가 지속됐다. 오히려 사회경제 체제가 크게 변화한 것은 97년 경제위기와 그 결과로서의 98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부터인데, 이것이 두 번째 분기점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87년 체제’는 보수 진영이 민주화운동과 민주화세력의 역사적 의의를 상대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개념이기 때문에, 그리고 체제라는 개념은 정치와 경제의 조응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98년 체제’가 학문적 적합성이 높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 97년 이후 진보적 담론은 높은 추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를 거부해 왔지만, 구체화된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무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전략은 다양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그것은 주주자본주의, 개혁 신자유주의, 발전국가의 민주적 재편론, 정통 케인즈주의, 그리고 급진좌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기존 좌파 이론들이 구체적 추상수준을 하강시켜 정책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진보 담론 위기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진보진영에 과연 성장담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늘어나고 있으며, 따라서 진보 진영은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조희연=현재의 위기는 전환적 위기다. 87년 체제 즉, 민주개혁을 시대정신으로 했던 어떤 체제가, 포스트 87년 체제로 이행하면서 발생한 전환의 위기다. 전환의 위기는 양면성이 있다.
우선 실패의 위기는 아니다. 성공의 위기인 지점이 있다. 이는 시대적으로 요구됐던 민주개혁이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고 확장되면서 나타난 성격의 위기다. 87년 6월 항쟁에 내재된 민주개혁 의제가 일정 수준에서 실현됐다. 과거사 청산 등이 그렇다. 전환의 위기라는 것은 새 의제가 없게 된 것에서 비롯한다.
두번째로 87년 체제에서의 민주개혁세력이 계급적 한계가 있는 듯하다. 이것이 민주화가 세계화의 한계와 굴레 속에서 전개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인정하면서 나타난 위기다.
현재는 87년 체제에서 등장했던 아래로부터의 동력들이 97년 체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적응적으로 포섭되면서 나타난 체제다. 97년 체제는 개발독재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면서 나왔다. 87년 체제의 수혜자인 김대중 등 민주세력이 신자유주의 개발국가의 담지자가 되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났다. 자유주의적 민주화세력이 신자유주의의 하수인이 되는 형국이었다. 민주적 정당성을 신자유주의의 추동을 위해 활용하게 된 것이다. 결과로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로 가야하는데, 계급적으로 고착화된 어떤 현실을 낳게 되고 치유 못하게 된 위기라는 생각이다.
박태균=개인적으로 진보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지금까지 너무 안이했다. 그러한 안이함은 보수의 문제로 인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진보’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한 채 ‘진보’의 깃발만을 내걸고 있었다. 또한 ‘진보’는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는 데에도 실패하고 있다. 사회적 담론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New Right가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이에 대항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대응하는 것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New Right의 내용이 형편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보가 대중적인 공감대를 갖고 대응할 만한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너무 자기 안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할까.
진보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방향이 필요하다. 하나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도 서양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현실에 맞는 이론을 개발해 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서양의 발전된 이론들을 빠르게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적 현실이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성찰이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얻도록 노력해야한다.
둘째로 대중성의 획득이다. 진보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만으로 자신들의 만족을 구했다. 대중들은 좀 더 쉽게 다가가는 언어들을 원하고 있다. 네티즌들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론을 주도하고 있지만, 기실 전체의 몇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좀 더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설득력 있게 접근해야 한다. 그 첫 번째 길은 무엇보다도 쉬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일영=정치세력으로서의 진보개혁세력은 80년 초 신군부에 패배한 이후 꾸준히 성장해서 87년 이후에는 불패의 가도를 달려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세력이 가진 이념은 앙상한 것이었다. 좌담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도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고민이 새로운 이념과 대안으로 전환, 숙성되지 못했다. 외형상 이념, 사상문제로 논쟁하고 투쟁하는 것은 거의 사라졌고 일부에서는 혐오의 대상까지 되었다고 하나, 운동 내부로 들어가 보면 NL, PD의 지형이 연속되고 있다고 한다. 인식의 지체는 개탄스러울 정도다. 80년대 후반 이후는 세계경제상 중대한 전환을 한 시기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물론이고, 중국의 등장, 북한의 약화로 인한 동북아질서의 변동, 급속한 속도의 기술혁명이 본격화된다. 무엇보다 금융, 무역, 투자의 세계화가 큰 흐름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 외부적으로는 대외관계와 남북관계의 판을 새로 짜야 하는 조건에 처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종래의 발전모델이 더 이상 잘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진보개혁세력은 정치적 승리를 통해 조금씩 권력과 제도에 접근해갔으나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는 진보와 개혁의 의제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이 위기의 본질이고 실체다.
고병권=진보세력이라는 게 어떤 고정된 실체인지 생각해봐야한다. 진보 세력의 재구성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역사를 겪어내고 있다는 식의 생각은 위험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해 온 세력이 이제부터 신자유주의에 대응해 대안을 사고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 속에서는 새로운 진보 세력, 가령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우리 시대 다양한 소수자들의 자리가 없다. 진보 세력을 재구성하려는 사고가 빠져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민주세력이 신자유주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점을 매우 이상한 현상처럼 말하고 있는데, 87년 이전의 민주/반민주 구도를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연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과연 신자유주의가 반민주인가. 그렇게 단정할 수만은 없다.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효과적인 확산을 위해 해당 국가에 정통성이 있는 민주 정권을 요구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는 어떤 점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세계적 강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논의를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의 논의 속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된, 이른바 ‘진보세력’에 한해서만 말해보겠다. 내 생각에 이른바 ‘진보세력’의 가장 큰 위기는 진보를 정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가 뭐냐는 것에 대해서, 80년대에는 일반 민주주의의 확장이 진보라고 했는데 오늘날 진보에 대해 정의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큰 위기 아닌가 생각한다.
다음으로, 운동이 있는 곳에 이른바 ‘진보세력’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관심은 온통 ‘노-사-정’의 협상테이블에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갈등은 협상 테이블 밖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바깥 영역’에 대해 진보진영은 어떤 담론을 갖고 있지 않다.
셋째,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진보세력이라는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국가주의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80년대에는 우리가 뭘 투쟁하고 뭘 요구할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투쟁의 요구를 어떻게 들어주어야 하나를 고민한다. 이제는 운동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을 해결하는 사람으로 전화되고 있다. 이의제기가 아니라 이의를 해결해야할 사람으로 말이다. 진보적 상상력이 국가주의 안에 갇히고 흡수된 것 아닌가 싶다. 과연 진보세력이 노무현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가. 진보진영이 그래야만 하는가 의문이다.
조현연=87년 체제에서 97년 체제로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현존 사회주의권 붕괴가 진보진영, 특히 지식계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왔다. 그 이야기 빠지면 안 된다. 국내적 계기와 관련해 91년 5월 투쟁 이후 운동의 도덕성 상실, 이데올로기적 공격에 저항을 제대로 못한 것이 97년 체제의 한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진보의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 생각은 있는데 합의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집합적으로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동의할 수 있는 진보를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진보의 위기란 게 한국사회의 위기와 함께 간다는 점이다. 공동체적 가치가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회 불안에 대한 짐을 개인들이 짊어짐으로써 사회의 위기, 진보의 위기가 오는 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진보주의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변화와 개조, 그것을 토대로 이상적인 미래 사회의 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과 인간이성의 신뢰에서 비롯된다. 다수의 사람이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 여기에 답을 주지 못하면 진보의 재구성 계획은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 현실의 고통, 그 원인을 찾으면서 진보를 재구성해야 한다.
김명인=진보세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담론의 측면, 세력의 측면, 그리고 실천의 측면에서 보자.
담론의 측면에서 보면, 과거와 같은 정통적 담론을 다시 재현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진보담론의 스펙트럼이 자유주의부터 급진주의까지 매우 넓어지고 또 그 안에서도 분화가 이뤄졌다. 따라서 지금은 진보세력 간의 최소 강령적 합의 같은 게 중요하다.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문제의식 무엇인가 하는 데서 출발하여 이 사회의 미래 형태나 경로에 관한 일정한 합의가 어디까지 가능한가가 이야기 돼야 한다.
그 다음 세력 재구성과 관련해선, 과거처럼 통일성과 위계를 지닌 조직이 아니라, 이러한 최소 강령적 합의에 기초한 연대적 틀 속에서 각자의 역량과 의지에 따라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천의 측면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국가주의적으로 포획되지 않는, 주변적이고 경계적이며 해체적인 저항이 있을 것이며 다른 편으로는 중심권력에 참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해체적이고 저항적인 운동과 구심적이고 참여적인 운동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생산적 긴장 속에서 역량을 배분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임지봉=보수와 진보라 했을 때, 보수는 기존 체제 유지를 선호하는 입장이고, 진보는 기존 체제의 변화를 선호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87년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반독재, 반군부통치에 있다. 즉, 87년 헌법은 첫째로 군사정권 하에서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억압받은데 대한 항의로서의 자유주의적 측면이 있다. 두번째로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한데서 출발한 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성격이 그 후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각각 발전해 왔다고 본다. 즉, 자유주의라는 것은 특히 가진 자들 입장에서 재산권이라는 권리 중심으로 이해되면서 기득권층의 기득권 보호 논리로 발전했다. 이것이 성장주의와 결합하면서 한국 보수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두번째로 민주주의는 이것이 국민의 뜻에 의한, 국민에 자신에 의한 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모색하는 입장으로 발전되면서 이것이 한국 사회의 진보세력을 형성했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를 진보의 위기라고 보기보다는 87년 체제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보수와 진보가 뚜렷이 분화되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경쟁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젠 드디어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경쟁, 생산적 경쟁이 본 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세력 쪽의 추상적 공론은 사회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 제시라는 측면에서 취약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이제까지는 주로 사회현상 분석을 하면서, 과거 회귀적 성찰에 진보세력들의 연구와 논의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한 구체적 대안제시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늦은 것은 아니다. 김호기 선생 말씀대로 담론은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세력 자체는 확실히 형성되고 발전될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한다.
박명림=진보담론의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우선 근대 이후 진보세력은 사회주의적 문제의식과 어떤 형태로든지 일정 부분 연결돼 있었다. 탈냉전은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나타났고 그 결과 세계적 수준에서 진보담론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둘째, 한국에서 진보담론의 재구성은 민족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특히 통일문제 및 북한의 현실에 대한 곤혹스러움이 있다. 북한의 체제 이데올로기는 현재 총체적인 파탄을 맞았다.
셋째, 국내 수준에서 달성해야할 정치, 경제적 과제가 적지 않았는데, 민주화 이후 이것이 교착국면에 빠져버렸다. 신자유주의 문제만 해도 사회주의 붕괴나 북한문제와 관련 없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체계적으로 잘 대응했어야 되는데 여기에서 큰 어려움이 있었다.
양현아=내가 이해하는 한국의 근대 역사의 성격대로, 현재 역시 과거의 과제는 청산되지 않은 채, 새로운 과제들이 중첩적으로 제시되는 형태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과거의 불의를 청산해야 하는데,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 등 새로운 현상이 물밀듯이 오면서 우리 사회의 시대착오성이 더욱 깊어지는 상황이다.
이른바 진보진영이 갖고 있는 발전의 구도, 국가에 대한 틀이 뭐였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심각한 현상이 그간의 ‘정치담론’에 잡혔었는지 문제다. 땅값, 집값. 과도한 교육 경쟁, 저출산, 고령화 등은 모두 이른바 진보담론에 잡히지 않았던 영역이다. 진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사실 이상하고 촌스럽다. 뭐가 진보인가. 진보를 어떻게 단수로 말하나. 여전히 국가, 정치, 시민 다룬 후에 마지막 쯤 생태, 여성 등이 나온다. 아직도 우리 삶의 속살을, 정치담론과 진보담론이 포섭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바라보는 경계가 새로워졌으면 한다. 외국인노동자, 국제결혼 등의 사회문제 등을 국가민주화 담론 속에 어떻게 포섭할 지 생각해야 한다.
다른 한편, 보다 래디컬하게 예컨대 공개념을 도입하여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치고 들어갔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왜 노무현 정부 와서 문제인가. 박정희 때도 빈익빈부익부로 먹지 못하는 사람 많았다. 이제 진보들이라는 복수성을 찾아야 한다.
징병제, 노동, 비정규직, 빈곤, 노인가구, 가족, 저출산, 요즘 심각하게 제기되는 아동 방치…. 게다가 아동들의 곤궁한 상황을 보면 그동안 아줌마들이 행해왔던 보살핌 노동이 얼마나 중대하고, 요즘말로 유비퀴터스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앞으로 이런 활동의 의미가 더 커지고 또 사회화될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진보 담론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뭔가?
지금 같은 방식으로 진보담론은 여전히 삶과 괴리될 것이다. 예컨대 한국정부가 가입하지 않은 외국인노동자 협약이 있는데, 외국인 노동자 하면 곧장 남자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 현실은 가사도우미, 성매매여성, 국제결혼 등 성별과 노동의 측면에서 다양하다. 여성과 노동자, 장애 등 현실의 복수성을 포착하기 위해선 하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추상적으로 현실과 괴리돼 있다. 앞날의 패러다임은 새로운 지평에 서야 한다. 정리/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김명인 교수 발제문 요지 진보세력 또는 진보담론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은 이제 하나의 진부한 레토릭이 돼버렸다. 다시 말해 위기로서의 의미조차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게 됐다. 민주화라는 제한된 성취는 오히려 진보세력과 진보담론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 일부는 자유주의적 현실권력에 참여했고, 일부는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일부는 우경화, 보수화했고, 일부는 전통적 ‘운동권’에 잔류하고, 일부는 비판적 관조주의에 침잠해 있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급속하고 강력하게 추진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은 ‘87년 체제’의 취약성과 한계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의제들은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속에서 하나하나 폐기처분되고 있다. 극단적 시장주의의 흐름 속에서 자본의 신성불가침성이 재확립되고, 노동계급은 유연화라는 명분 속에서 자본에 하염없이 종속되어 가고, 공동체적 연대성을 비롯한 민주적 가치들이 허무주의적으로 희화화되고,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야만적 시장논리의 절대화 앞에서 공동체사회의 비전이나 대안이 인식이 공동화되고 있다. 이런 불행과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그 어떤 희망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에 대한 이른바 ‘진보세력’들의 정체성 혼란과 현실대응력의 빈곤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진보적 지식인 사회부터 철저한 자기반성을 거쳐 이러한 불행과 고통에 대한 구체적 진단과 처방을 마련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담론·실천의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높은 추상수준과 낮은 현실적응성을 특징으로 하는 담론생산의 상아탑을 벗어나 구체적인 대안적 정책담론들을 생산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통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악조건 속에서도 성장해 온 남한사회의 민주적 역량과 결합하여 세상을 구체적으로 바꾸어나가는 실천궁행의 자세가 더없이 소중하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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