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겨레 자료사진
성소수자 남성인 ㄱ씨는 2006년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 확진을 받았다. 2018년 7월 남성과 만나 사정 없이 구강성교를 했으나 사소한 다툼 끝에 경찰서에 가게 됐고 그 과정에서 HIV 감염 사실이 알려졌다.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병원 진단을 받았던 ㄱ씨는 HIV가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HIV 감염인의 일부 체액에는 HIV가 있지만, 타인을 감염시키려면 바이러스가 일정량 이상의 수치가 돼야 한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 국립중앙의료원 감염병센터 의견을 종합했을 때, ㄱ씨는 타인을 감염시킬 위험성이 없었다. 상대방 남성도 HIV에 감염되지 않았다. 그러나 ㄱ씨는 바이러스가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성관계를 한 혐의(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에이치아이브이(HIV) 감염인을 낙인찍던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가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오른다.
14일 한겨레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서울서부지법 형사6단독 신진화 부장판사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위반 등으로 기소된 ㄱ씨 사건과 관련해 ‘후천성 면역 결핍증 예방법 19조와 25조의2가 위헌인지 아닌지 판단해달라’고 지난해 11월 위헌법률 심판 제청을 내 헌재가 심리 중이다. 이 법 19조에 따르면, HIV 감염인이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 매개 행위(HIV 전파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25조의 2에 따라 벌금형 없이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은 HIV 감염에 의해 나타나는데, HIV에 감염된다고 해서 모두 에이즈를 얻는 건 아니다. 법 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데다, HIV 감염 예방은커녕 감염인에 사회적 낙인을 찍어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법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서울 재동 헌재 대심판정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의미 불분명한 ‘전파매개·체액’
ㄱ씨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이 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봤다. <한겨레>가 입수한 결정문을 살펴보면, 누구나 이 법 19조가 어떤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하는데 법이 추상적이고 불명확해 죄형법정주의(범죄와 형벌이 법률로 정해져야 함)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재판부는 봤다. 이 법에 따르면, HIV 감염인이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전파매개 행위를 하면 처벌 대상이 된다. 하지만 법이 언급하는 ‘전파 매개 행위’나 ‘체액’이 무엇을 의미하는 명확하지 않다. 재판부는 “HIV를 실제 감염시킨 사람을 처벌하는지, 아니면 감염시킬 위험이 있는 사람을 처벌하는 건지, 그렇다면 HIV가 조금이라도 포함된 혈액이나 체액을 전파 매개하는 행위가 있으면 바로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그렇다면 정액과 같이 전형적인 전파매개체가 아닌, 눈물이나 땀이 전파되는 순간에도 곧바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콘돔없는 성행위는 바로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실제 감염인에 대한 처벌도 수사기관과 재판부 마음대로 이뤄진다. 실제 기소된 사례들을 따져보면, HIV를 옮긴다는 전파 매개 물질이 정액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그 체액에 실제 바이러스가 포함됐는지, 그 바이러스는 감염가능한 정도인지, 상대방은 HIV에 감염됐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저 감염인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관계하는 경우 기소·유죄 판단을 내린다. 이대로라면 처벌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된다. 실제 2002~2018년까지 기소된 사례 42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성관계 상대방이 HIV에 감염된 사례는 1건에 불과했고 그 마저도 피고인과의 성관계로 HIV에 감염됐는지 불분명했다는 연구 결과(‘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상 전파매개행위 처벌의 문제’, <공익과 인권>)도 있다. 재판부는 “감염인은 타인과 같은 빨대를 사용하거나, 운동하면서 함께 땀을 흘린후 옷깃을 스치거나, 공중밀집지역에서 재채기를 해도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할 수 있다. 감염인이 타인과 신체를 접촉하기만 하면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할 위험성이 무한히 확장돼 한번 감염인이 되면 사실상 접촉을 수반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활동이 대부분 금지 대상에 속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관에 따라 유무죄의 판단이 달라지거나 법집행 기관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재판부는 나아가, 법 19조가 콘돔없이 성행위를 하는 감염인을 처벌하는 데 쓰인다 가정해도 “감염인의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에 벗어난다”고 짚었다. 이 법이 처음 만들어진 건 1987년이다. 에이즈를 예방한다며 HIV 감염인이 ‘대통령령이 정하는 감염예방 조치 없는 성행위’나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타인에게 전파 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HIV 감염을 막는 데 적정한 수단이라 보기 어렵고 추상적 위험만으로도 HIV 감염인을 과도하게 형사처벌한다며 이 법 조문을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내자, 이듬해 지금과 같은 법조항으로 개정됐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현재 HIV의 감염 위험성은 현저히 낮아졌고 사실상 법은 사문화된 상태다. 동의 없는 성행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감염사실이 밝혀지면 기소하는 정도다. 재판부는 “법이 사문화돼있으면서도 사안이 밝혀지면 자연인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행위들이 수사 및 처벌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이 법이 있는 한 “감염인의 일반적 행동자유권, 행복추구권의 침해는 심각하다. 감염인은 사실상 접촉을 동반한 인간적 관계들을 모두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를 위반한 감염인을 벌금형 없이 오직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25조의 2도 “감염인의 행동자유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봤다.
■ HIV 예방효과는 없고 낙인만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이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이 법이 삭제돼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꾸준했다.
2008년 법의 개정이유는 “감염인의 자발적인 검진을 유도하고 후천성면역결핍증 검진을 활성화해 감염예방의 실효성을 제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애초 입법 목적이었던 HIV 감염 예방효과가 적고, 오히려 감염인만 형사 처벌로 내몬다는 지적이 나왔다. 2014년 질병관리본부에서 HIV 감염 확진을 받은 ㄴ씨는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다섯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성관계 상대방은 HIV에 감염되지 않았다. ㄴ씨는 당시 바이러스 증식 억제 치료를 꾸준히 받아 바이러스가 억제돼 의학적으로 전염 가능성이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원은 “성관계 등을 통해 HIV를 전파할 위험이 사실상 0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진다는 연구결과들이 있으나 그 위험이 0이 된다고 일반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류민희 변호사(희망을만드는법)는 “감염 사실을 알고 조기에 치료해서 바이러스 억제 상태가 유지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가장 문제는 본인이 HIV 감염인인 것을 모르는 것인데, 이 법은 HIV 감염을 처벌가능한 무서운 질병으로 만들어 오히려 조기 검진을 꺼리게 만든다. 어떤 매개질환도 이렇게 처벌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이 법이 감염인을 예비범죄자로 만들어 사회적 낙인을 강화시키는데, 이때문에 검사를 피하거나 감염을 확진받아도 이를 관계당국에 공유하지 않고 숨게 된다는 설명이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의사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가 발견되고 뚜렷한 치료법도 없던 상황에서 이 법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환자가 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한 조절이 가능한 병이다. 과학적 사실과 관련해서 법령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B형간염이나 C형간염 바이러스도 성접촉 통해서 전파 가능하고 항체가 없으면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켜도 법적 제재를 당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질병의 형평성이라는 측면에도 모순이 있다”고 짚었다.
의도적인 HIV 전파 행위는 이 법이 아닌 형법으로도 처벌 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민중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은 특별법이기 때문에 형법보다 우선 적용된다. 이 법이 없어도 형법상 상해 등으로 처벌가능하다. 캐나다나 독일 등 해외 국가에서도 상해죄로 규율해 처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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