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부수석 등 7명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상고심 판결에 앞서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직권남용의 구성 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한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일선 재판에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하면서, 사법농단이나 조국 전 장관 사건의 재판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명박·박근혜 정부 인사는 물론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전직 대법원장, 현 정권의 법무부 장관 등까지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재판 중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혐의 40여개 대부분은 직권남용으로 구성됐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에 개입해 사건 처리를 지연시키거나 개혁적 성향의 판사들을 사찰하고 이들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해 인사 불이익을 준 정황이 대법원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 수백개로 남아 있다. 검찰은 이 문건 작성 행위를 포착해, 양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하여금 문건 작성이라는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봤다.
대법원은 이날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한 행위가 법령에 위배되는지 엄격하게 살펴서, 그 행위가 직권남용의 구성 요건인 ‘의무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단대로라면,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업무상 따라야 하는 법령상 의무나 원칙이 무엇인지, 문건 작성 행위가 그 요건에 어긋났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검찰은 지금까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이나 법원조직법 등을 근거로 이들의 위법성을 주장해왔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대법원은 기존의 의무없는 일 개념을 ‘법령상’ 의무없는 일이라고 좁혀서 해석했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의무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추상적 해석을 더 까다롭게 따져볼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사건)과 황운하 전 울산경찰청장(청와대 선거개입 하명수사 의혹 사건) 등 현 정권 인사들도 직권남용 혐의로 줄줄이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조 전 장관이 2017년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특별감찰반 감찰을 통해 유재수 전 부시장의 비리 정황을 파악하고도 특별감찰반 부하 직원으로 하여금 감찰을 중단하게 했다고 봤다.
판단의 핵심은 조 전 장관이 특별감찰반 부하 직원의 권리행사를 방해했는지다. 감찰 중단 행위의 근거가 직무집행 기준이나 원칙을 위반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조 전 장관이 위법한 지시를 했다고 해도 부하 직원이 그 지시가 위법하다고 인식했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또 다른 재경지법 판사는 “의무없는 일이나 권리행사 방해 개념은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대법원이 하급자가 ‘의무없는 일’을 한 것에 대한 판단을 독립적으로 한 만큼, 일선 재판부도 (감찰) 권리 행사를 방해한 것이 맞는지 면밀히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전 장관의 변호를 맡은 김칠준 변호사는 “조 전 장관이 특감반원의 권한을 침해했다는 게 (검찰 수사의) 핵심이다. 특감반원의 권한이 인정되지 않으면 수사 전체가 사상누각이 된다. 잘못된 전제하에 진행된 무리한 수사가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벌어진 사건의 직권남용 재판도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심에서 직권남용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이 전 대통령은 항소심에서 다스의 미국 소송 지원을 하급자에게 지시한 행위가 대통령의 ‘직무상 권한’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다퉜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등 감찰을 지시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방해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항소심도 진행 중이다.
고한솔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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