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일 서울 서초구 갤러리 빈치에서 열린 ‘콘돔 오아 반창고’ 프로젝트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 전시회’에서 작품을 전시한 작가 넷이 작품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반짝이풀로 색을 입힌 콘돔 200여개를 매달고,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콘돔을 걸어놨다. 성인이 될 때까지 무조건 참으라고 하는 어른들에게 도발적인 전시회를 기획한 작가 11명을 만나봤다.
질병관리본부에서 한 ‘청소년건강행태조사’를 보면, 성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평균 성관계 시작 연령이 13.6살, 고3 남학생의 성관계 경험률 14.6%, 그러나 이들의 피임 실천율은 58.7%인 현실에서 작가들은 ‘건강권’으로서의
콘돔을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던 시기, 종종 (대학)
기숙사 로비에는 택배를 찾아가거나 방 수리를 요청하는 친구들이 오갔다. 가끔 (로비) 사무실 책상에 둔 콘돔 상자에서 콘돔을 가져가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 조금 낯설어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어봤다. 친구들은 웃으면서 ‘비타민’이라고 답했다. 콘돔을 비타민이라고 하는 친구들을 보며 안전한 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이 도구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작가 ㄱ)
“이번 여름 아프리카 케냐의 유엔(UN)사무소를 방문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자판기에 있는 빨간 봉지가 눈을 사로잡았다. 케냐 정부가 만들어 유엔에 제공하는 무료 콘돔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콘돔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건강권으로 인식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작가 ㄴ)
지난해 11월, 열한 명의 10대와 20대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0대들의 성 지식이 음지에서 유통되는 현실에서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성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구상하는 자리였다. 같은 시기 경기도 한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치활동으로 콘돔 전시회가 열린다는 사실에 이들은 주목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전시회의 규모를 키워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들은 음란물을 통해 전달되는 그간의 성담론에 반발하고 10대의 건강권과 피임권을 말하고 싶었다. 10대의 성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엮어, 작은 책자와 다큐멘터리도 함께 만들기로 했다. 이름하여 ‘콘돔 오아 반창고’ 프로젝트다. 반창고같이, 건강을 위한 일회용 의료용품으로 콘돔을 인식할 때임을 알리자는 뜻이다.
청소년 페미니즘 단체 ‘위티’와 자주적 섹슈얼리티를 위한 단체 ‘자색’은 지난 30일부터 오는 2일까지 서울 서초구 갤러리 빈치에서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억압받는 청소년의 성에 대해 말하고 정정당당하게 사랑할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 11명이 작품 16점을 전시했다. 작가 중 9명이 10대다.
이들은 전시회를 앞두고 열흘 동안 ‘콘돔과 관련된 잘못된 통념’ ‘콘돔 구매 때 듣기 싫었던 말’ ‘우리들이 사랑할 수 있는 공간들’에 대한 경험담을 모았다. 이를 기록할 책자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후원금을 모았더니, 22명으로부터 50여만원이 모였다. 지금, 왜 10대는 자신들의 욕망할 권리에 대해 말하려 하는 것일까.
지난달 초 작가 열한 명이 모여 전시회의 작품을 만드는 모습. 위티 제공
피임 도구 접근 어려운 10대
“내 몸과 정체성을 배우는 것에 적절한 시기라는 게 있나요?”
“청소년의 성에 대한 무지함은 왜 칭찬을 받나요?”
“왜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이 콘돔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요?”
30일 오전, 30평 규모의 갤러리에서 문을 연 이 전시회에선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언어들이 비디오아트 화면을 통해 터져나왔다. 천장엔 반짝이풀로 색을 입힌 무지개 빛깔 콘돔 200여개가 달려 있었다. 상자에 손을 넣으면 콘돔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청소년에게 사랑할 공간이 허락되지 않아 안전하지 않은 장소에 숨어야 했던 이야기를 사진과 그림, 글로 표현한 작품도 전시됐다. 청소년이 마음 편히 콘돔을 살 수 없는 세상을 선인장 가시로 표현한 작품에는 “콘돔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콘돔을 공개적 장소에서 꺼내 보고 이야기하는 환경이 더 많이 마련되는 것을 원한다”고 작가는 적었다.
이 전시회는 성인용품으로만 소비되는 콘돔을 반창고와 같은 의료기기로, 피임 도구의 하나로 인식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마련했다. 전시회에서 만난 45살 직장인 문아무개씨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금기로 인식되는 이야기를 예술 작품을 통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은 전시회였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청소년의 성을 현실과 동떨어진 낡은 교과서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전시만이 아닌 10대들의 성담론을 활발히 이끌어내자는 의도도 담겼다. 김화현 위티 집행위원장은 “10대들에게도 그저 참고 억누르는 성이 아닌 건강하고 안전하게 누리는 성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함께 새로운 윤리적 지대를 상상해볼 때”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점, 약국 등 여러 상점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콘돔을 살 수 있지만, 돌출형 콘돔 등 기능성 제품은 청소년 유해 물건으로 지정해 청소년(청소년 보호법상 ‘청소년’은 19살 미만인 사람)에게 팔 수 없게 해놓았다. 여성가족부가 지정한 ‘청소년 유해 물건 고시목록’을 보면, 요철식 특수 콘돔 등은 청소년에게 음란한 행위를 조장하는 성기구로 돼 있다.
이들 콘돔은 사용을 제한하지 않으면 청소년의 심신을 심각하게 손상할 우려가 있다는 게 여성가족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10대는 실제 성관계, 임신과 출산이 이뤄지고 있는 연령대다. 질병관리본부 등의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를 보면, 청소년의 성관계 경험률은 10년 사이 5.1%(2009년)에서 5.9%(2019년)으로 증가 추세다. 성경험이 있는 중1부터 고3 청소년을 기준으로, 성관계 시작 연령은 평균 13.6살(2018년 기준)이다. 2019년 기준으로 고3 남학생의 경우 100명 중 15명(14.6%)꼴로, 고3 여학생의 경우 100명 중 7명(7.2%)꼴로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성관계 경험자의 피임 실천율은 58.7%에 그친다. 실제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진 경우도 상당하다.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모(母)의 연령별 출생건수’를 보면, 15~19살 여성이 출산한 건수는 1907건(2016년), 1520건(2017년), 1292건(2018년)이다.
전시회 준비위원들이 모여 학습모임을 하는 모습. 위티 제공
“우리 아이를 지켜야 합니다”?
10대의 성을 바라보는 관점도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2년 전 스쿨미투가 활발할 때 학내 성폭력 고발 운동을 계기로 만들어진 청소년 페미니즘 단체 ‘위티’는 지난해부터 전국 강연을 열며 10대의 성에 관한 새 담론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자주적 성 결정권을 가진 존재로서 청소년을 이야기할 때라고 말한다. 양지혜 위티 공동대표는 “청소년에게 정확한 성 지식을 가르치지 않고 엄숙주의만으로 10대의 성을 음지로 내몰면 당사자들은 더 위험하고 비인권적 상황에 머물게 된다. 10대는 아직 미성숙하며 이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보호주의, 강요된 생애주기에 우리는 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이어 “자신의 욕망과 감각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새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위티는 지난해 청소년 섹스토크 집담회 등을 열고 △보호주의식 성교육 거부 △하이틴로맨스가 말하지 않는 다양한 사랑의 서사 상상하기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주의 거부하기 등을 주제로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을 펼쳤다.
물론 이 같은 활동은 반론도 상당하다. 지난해 하반기 맘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위티의 강연 계획에 반대하며 위티에 소속된 동아리가 있는 학교를 대상으로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를 지켜야 합니다”라는 전화를 거는 항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지혜 위티 대표는 “위티 구성원들이 일부 맘카페나 종교단체로부터 ‘문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10대들의 콘돔 접근성을 높이는 지방정부의 사업이 좌초되기도 했다. 2018년 초 서울시는 향후 5년간 진행할 ‘제2차 인권정책 기본계획 개요’를 내놨는데, 당초 이 계획의 세부사업으로 청소년 보건 사각지대 개선을 위해 학교밖 청소년에게 콘돔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국외 여러 나라가 학교나 청소년지원센터에서 청소년들이 자판기로 콘돔을 사거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보수적 보건교사단체의 반발로 최종 사업에 반영되지 못했다.
당시 보건교사들 사이에는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진보 성향의 보건교사단체 보건교육포럼은 지지성명을 내고 “청소년의 피임 실천율이 낮은 것은 콘돔을 구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하다. 청소년에게 성에 대한 책임이나 성적 결정권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공개 토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성경험 연령이 빨라지는 상황에서 안전한 성관계를 위한 지원이 절실하다. 무조건 어른이 될 때까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만 반복하는 일은 청소년의 성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30일 서울 서초구 한 갤러리에서 열린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 전시회’ 전시장.
외국은 이렇게 한다
성적 호기심이 높아지는 연령대인 청소년기에 효과적인 피임법을 알려주고,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질 경우 학교가 이를 적극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판단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중·고교) 학생의 임신·출산 시 산전후 요양을 보장하고 다양한 방안으로 학습권을 보장하라’고 교육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임신·출산으로 학교를 결석해 유급될 수밖에 없었던 중학생이 지난해 6월 진정을 내 이끌어낸 결과다. 인권위는 “임신과 출산한 여성에 대한 모성보호는 아동(청소년)도 예외가 아니며, 특히 아동(청소년)이란 취약성에 따라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더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임신·출산한 청소년에게 산후조리와 양육 지원 등을 보장하라고 대한민국에 권고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 학생인권조례에 임신·출산한 학생에 대한 차별 금지 항목을 담은 것이 있고, 교육부도 7년 전 임신·출산한 학생의 교육권을 침해하는 학칙을 점검해 개정하라고 일선 교육 현장에 지시하기도 했지만 아직 미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인권단체들은 인권위의 권고에 공동 논평을 내고 “임신·출산이나 성적 경험 등을 ‘학생답지 않다’고 간주해 임신·출산한 청소년을 사실상 학교에서 추방해온 관행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청소년의 임신·출산이 도덕적 잘못이자 일탈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꿔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교회언론회 등은 지난해 말 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반대하며, ‘순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의 흐
름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인권위 결정문을 보면, 미국과 영국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학업 중단 상황 때 출석으로 인정하거나 휴학이 가능하게 하고 있다. 대만은 2007년부터 출산휴가제를 시행해
고교생도 출산휴가와 육아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 남학생도 출산휴가 또는 육아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임신과 출산을 한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전국 15개 기관을 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해 대안 교육프로그램을 제공받게 하고 있지만 위탁교육 인원은 58명(2016), 77명(2017), 65명(2018)이었다. 같은 기간 15~19살 출산건수(1300~1900여 건)에
견줘 턱없이 적다.
글·사진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