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017년 8월30일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법정 구속됐다. 2015년 10월 보석으로 풀려난 지 22개월 만이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국정원 정치 개입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원 전 원장은 2017년부터 민간인 댓글부대 운영 및 전직 대통령 사찰 등으로 9차례 기소됐고, 그에 대한 1심 판단이 3년여 만에 나왔다. 그는 앞선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징역 4년형을 확정 받아 수감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이순형)는 7일 원 전 원장 등의 국고손실 및 국정원법 위반, 뇌물공여 등 혐의에 대한 선고 기일을 열어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원 전 원장과 함께 기소된 김재철 전 엠비시(문화방송) 사장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160시간의 사회봉사를 선고받았다. 그 밖에도 원 전 원장의 지시를 받아 정치 공작 활동에 가담한 전직 국정원 간부 등도 집행유예형∼징역 2년6개월 등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대통령과 정부 정책에 대한 찬반은 개인과 정당, 정치적 결사체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을 통해 자유로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통제는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해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며 “수십년간 국정원에서 국가안보 활동에 매진하던 직원들이 위법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형사 처벌을 받게 됐다. 원 전 원장은 객관적 증거들이 다수 존재함에도 모두 부인하거나 입증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여 국정원장 수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결여했다. 또 막대한 국고손실 회복을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원 전 원장의 양형 이유를 밝혔다. 앞서 검찰은 징역 15년 및 자격정지 10년, 198억 상당의 추징금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유죄로 인정된 액수만큼의 이득을 개인적으로 취했다고 보긴 어렵다며 추징을 하진 않았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민간인을 동원해 댓글 조작을 하기 위한 사이버 외곽팀을 운영하면서 국정원 예산 약 66억원을 사용한 혐의(국고손실)를 유죄로 인정했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미화 10만 달러를,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과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에는 각 1억과 2억원을 국정원 예산으로 교부한 혐의도 모두 유죄 판단을 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이현동 전 국세청장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 추적을 의뢰하면서 1억 2천만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과 이 전 청장을 ‘공범’ 관계로 보았고, 이 전 청장이 받은 금원은 대가성이 있는 뇌물이 아닌 횡령액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안보교육을 명분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야당 정책을 비난하는 등 정치관여를 한 혐의(국정원법 위반)도 대부분 유죄 판단을 받았다. 원 전 원장은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국가협)를 설립해 안보 교육 실시를 명분으로 이 전 대통령의 안보정책을 지지하는 등 여론 조작을 벌인 혐의를 받았다. 재판부는 “국정원이 안보교육을 명분 삼아 민간단체를 설립해 인사와 예산으로 단체를 통제하고 정치활동을 한 것은 헌법과 국정원법이 규정한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한 위헌적 행위”라 밝혔다. 이에 재판부는 국가협 운영에 국정원 예산 47억가량을 쓴 혐의를 국고손실죄 위반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그 밖에도 민주노총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제3노총인 국민노총 설립 지원 명목으로 국정원 예산을 지원하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뒷조사한 혐의 등도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2011년 4월 국정원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 당시 이를 은폐할 목적으로 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에게 건넨 특수활동비 5천만원에 대해서는 뇌물 공여가 아닌 업무상 횡령만 유죄로 인정했다.
김재철 <문화방송>(MBC) 전 사장이 2017년 11월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김 전 사장은 2011년 국정원 관계자와 협력해 방송 제작에 불법으로 관여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원 전 원장은 김재철 전 엠비시(문화방송) 사장과 공모해 정권에 비판적인 방송인을 하차시키는 등 방송 장악을 시도한 혐의도 받았지만 재판부는 ‘무죄’라 판단했다. 원 전 원장은 엠비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진행자 김미화씨의 교체를 요구하고, ‘시선집중’에 출연하기로 한 배우 김여진씨의 고정 출연을 취소하도록 한 혐의를 받았다. 결국 이들은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제작진 일부는 징계 대상이 됐다. 검찰은 이러한 행위가 국정원장의 직권을 남용해 엠비시 경영진과 결탁해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이러한 행위가 “국정원장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로 볼 수 있으나 국정원의 직무권한에 해당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밝혔다. 부당인사 요구 등이 불법적 행위이긴 하지만 공무원이 직무권한을 남용했을 때 처벌하는 직권남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검찰은 원 전 원장과 김 전 사장의 출연자 퇴진 압박이 프로그램 진행 업무를 방해했다며 ‘업무방해죄’도 적용했으나 재판부는 이 부분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의 업무방해가 인정되려면 출연자 등에 대한 ‘위력’의 행사가 존재했어야 하는데, 재판부는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제작진 인사조치나 징계, 출연 계약 해지 등은 기존 원칙에 따라 이뤄진 일이므로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
김 전 사장은 다만 엠비시 노조원들을 직무 현장에서 배제하거나 노조원들에게 불리한 인사 평정을 해노조 탈퇴를 유도한 혐의 등이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원 전 원장은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처음 기소된 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 들어 시작된 국정원 적폐청산 재수사로 9번가량 추가 기소됐다. 법원에서는 그의 사건을 8개로 나눠 한 재판부가 심리하도록 병합한 뒤 지난해 12월 결심공판을 마쳤다. 2017년 10월 재판에 넘겨진 뒤 원 전 원장 등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170회 이상의 기일에 참여해 재판을 받았고, 법정에 나온 증인만 180명이 넘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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