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한겨레> 자료사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압박해 보수단체에 69억원을 지원하도록 한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해 대법원이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했다. 다만 대법원은 이들에게 적용된 강요 혐의를 무죄 취지로 판단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이날 오전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김 전 실장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재판을 다시 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항소심의 직권남용혐의 유죄 판단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원심이 인정한 강요죄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김 전 실장은 2014~2016년 전경련으로 하여금 보수단체 21곳에 약 24억원을 지원하라는 부당한 압력을 넣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조 전 수석은 2015년부터 1년간 보수단체 31곳에 35억여원의 지원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됐다. 1·2심은 김 전 실장에게 징역 1년 6개월, 조 전 수석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2심은 강요죄를 유죄로 인정했지만 직권남용죄는 판단이 엇갈렸다. 1심은 전경련에 대한 자금 지원 요청이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직무권한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고 무죄로 판단했지만, 2심은 유죄로 판단했다.
상고심은 1·2심이 인정한 김 전 실장 등의 강요죄에 대해 무죄라고 판단했다. 강요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할 때 성립한다. 대법원은 법 성립 요건인 ‘협박’에 대해 항소심과 다르게 해석했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 등이 청와대의 요직에 있는 상태로 전경련에 ‘지원’ 등을 요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협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김 전 실장 등 ‘박근혜 청와대’ 인사들로부터 전경련 구성원들이 압박받았다고 말한 진술을 두고 “내용이 주관적이거나, 대통령비서실의 요구가 지원 대상 단체와 단체별 금액을 특정한 구체적인 요구라서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꼈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항소심의 직권남용 유죄 판단은 정당하다고 봤다. 직권남용죄(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이 사건에서 김 전 실장 등의 자금지원 요구는 ‘직권의 남용’에 해당하고, 이로 인한 전경련 부회장의 자금지원은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달 30일 김 전 실장 등이 특정 문화·예술인을 배제하라는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사건에서, 직권남용죄의 성립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공공기관 직원에게 블랙리스트 작성 등 지시가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이 맞는지 구체적으로 따져보라는 취지로 판단했다.
이날 대법원은 이 사건의 직권남용 사례가 ‘블랙리스트’ 판결이 좁게 제시한 ‘의무에 없는 일’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일반 사인일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에 대응해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며 김 전 실장의 요구를 받은 전경련 부회장이 ‘의무에 없는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
박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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