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울증 약 좀 처방해주세요.”
은진(가명)님은 은행 콜센터에서 20년 동안 일했다. 예술대학에서 연극연출을 전공했지만 알바로 시작했던 콜센터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행복한 삶을 기대했는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다. 다른 원인 없이 몸에 힘이 점점 빠져 걷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약해진 근육 탓에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휠체어에서 생활한다. 희귀 난치 질환인 근이영양증의 한 종류로 그동안 정확한 진단명도 찾지 못하다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최근에야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대학병원에 가봤자 큰 도움이 안 돼요. 진단명을 말해줘도 제가 알 수도 없고, 희망이 없어요. 검사비만 매번 몇십만원씩 내요. 유전자 치료는 비싸서 시도해볼 엄두가 안 나고요. 지난번에는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이 절 보시더니 ‘김은진씨 정도면 괜찮네요’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황당하더라고요. 제가 겉보기에는 조금 괜찮아 보이긴 한데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해도 돼요?”
‘그 의사 선생님도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을 거예요’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실제로 그 대학병원의 의사가 진료한 수많은 환자 중 은진님이 비교적 경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은진님은 때때로 지옥을 경험한다. 콜센터 일은 전화로 대화하는 일이라 할 만한데 한달에 두세차례 화장실에 제때 못 가 사무실 자리에서 실수를 하면 자존감이 뚝뚝 떨어진다고 했다. 근육이 무뎌져서 스스로 느끼지 못하거나 급한 상황에서 재빨리 화장실에 갈 수 없어 실수하는 것이다. 동료 도움으로 화장실에 가긴 갔는데 곧 데리러 오겠다던 동료가 오지 않을 때 홀로 화장실에서 느끼는 자괴감은 얼마나 큰지.
“예전에는 친한 동료들이 도움을 줬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어서 눈치가 보여요.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나를 도와주다 보면 그만큼 일을 못 하니까요. 언제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은 할 만한데 하청으로 운영되는 거라 보직 이동이나 인원 감축이 언제 될지 몰라요.”
요즘 은진님의 가장 큰 걱정은 하나뿐인 딸이 같은 질환을 앓지 않을까다. 대학병원에서는 검사를 해보자고 하는데 남편과 상의해 급하게 검사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나도 발병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덧붙여,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은진님의 불안이 이해된다. 언제까지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녀에게 질환이 있을지, 본인의 질환을 치료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우울증 약을 처방해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 죄송할 뿐이다.
약에 의지해서라도 삶을 견뎌내려는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의학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널려 있다. 획기적인 치료제를 기다리는
고통은 누구도 나누기 힘든 오롯이 환자 당사자의 몫이다. 그 시간을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름대로 즐겁게 채워나갔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날이 생전에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자녀에게 본인과 같은 병이 생길 걸 걱정하기보다는 주어진 시간 속에 함께 성장해나갈지를 고민하다 보면 좀 더 풍성한 삶의 환희를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를 통해 비슷한 근이영양증을 앓는 다른 분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은진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고 했다. 자신만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했다. 그분들은 갑자기 찾아오는 숙명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고민하고 있었다. 깊은 명상에 잠기며 초월적 세계를 엿보는 분도 있고, 인권강사로 활동하시며 학생들을 만나 삶의 경험을 전하는 분도 있다. 아픔이나 불행을 호소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평범하게 전해준다.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며 나도 배우는 것이 많다.
나는 은진님의 희귀질환을 치료할 수 없다. 내가 처방하는 우울증 약이 그분의 우울을 해소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다. 그저 언젠가 직장을 그만둔다면 옛 전공을 살려 글을 써보겠다는 은진님을 격려하며 듣는 존재로 오랫동안 곁에 머물고 싶다.
▶홍종원: 찾아가는 의사.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꿈도 계획도 없다. 내 집도 남이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 고마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