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띠 차서 안돼…옷에 영어글씨 있어 안돼…눈동자 흐릿해 안돼
“머리카락이 귀를 가린 사진은 안 된다고 해서 머리띠로 넘기고 찍었더니 다시 머리띠를 한 사진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찍어 갔더니 이번엔 옷에 영어가 쓰여 있어 안 된다나요?”
5일 서울 한 구청에 여권을 신청하러 갔던 김아무개(23)씨는 여권용 사진을 4차례나 찍어야 했다. 그는 “머리띠를 하거나 옷에 영어가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구청 담당 직원에게 따져 물었지만 ‘규정에 그렇게 돼 있다’는 말뿐이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외교통상부가 지난해 9월 말부터 바꾼 여권 발급용 사진 규정이 모호하고 까다로워 민원인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새 규정은 국제민간항공기구 권고안에 따른 것으로, 여권의 위·변조를 막기 위해 사진을 부착 방식에서 스캔 방식으로 바꾸면서 도입됐다. 그러나 규정을 보면 ‘피부색은 자연스러워야’, ‘눈동자가 선명해야’, ‘가능한 한 얇은 안경테를 써야’ 등 기준이 분명하지 않아 구청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최근 여권을 만든 박아무개(27)씨는 “금테 안경을 쓰고 사진을 찍었더니 ‘눈동자가 선명하지 않으니 벗고 다시 찍어오라’고 했다”며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인데 늘 쓰고 다니는 안경을 굳이 벗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머리띠나 머리핀, 영어나 한글이 쓰인 옷에 대한 제한도 권고안에는 없는 것들이다. 권고안에는 ‘청색, 회색 옷은 안 된다’, ‘귀와 눈썹이 보여야 한다’는 조항만 있을 뿐이다. 외교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한 시민은 “구청 직원이 소개한 사진관에서도 규정을 제대로 모르고 있더라”며 “사진을 2차례나 찍느라 들인 돈은 누가 보상하느냐”고 말했다.
김상근 외교부 여권과 법규계장은 “새 규정이 적용되면서 이를 각 구청에 전달했으나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아 민원인들이 불편을 겪는 것 같다”며 “사진을 보통 2~3차례씩 찍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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