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 현장 접수가 진행된 지난 16일 낮 서울 은평구 역촌동주민센터가 신청하러 온 주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선착순 아니에요. 급하게 하실 필요 없어요.”
지난 16일 아침 서울 강서구 화곡1동 주민센터에선 노인들이 한데 엉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 신청을 위해 몰려든 인파였다. 주민센터 직원이 서두를 필요없다고 안내했지만, 노인들은 늦으면 혹시라도 생활비를 못 받을까 싶어 몸을 들이밀었다. 바닥에 표시된 ‘거리두기’ 선은 유명무실했다. 주민센터 직원은 “오전 9시부터 접수하는데 30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시는 코로나19 사태 속 지난달 30일부터 모바일이나 온라인으로 중위소득(4인가구 기준 475만원)에 못 미치는 이들에게 가구별 30만~50만원의 긴급생활비 신청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날 처음 현장 접수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모바일이나 온라인 접수에 어려움을 겪던 노인층이 몰려들었다. 현장 접수를 하기 직전인 이날 오전 8시까지 긴급생활비를 신청한 61만1090명 가운데 20~50대는 20% 안팎으로 비슷한 분포를 보였지만, 60대와 70대는 각각 11.7%, 5.1%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노인층이 디지털 정보에서 소외됐다는 얘기다.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 현장 접수가 시작된 16일 오전 서울 강서구 화곡1동 주민센터에서 여러 주민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실제 <한겨레>가 지난 16~17일 서울에서 노령인구(만 65살 이상)가 많은 은평구 역촌동(7969명), 강서구 화곡1동(7812명), 구로구 오류2동(7618명) 등 주민센터를 가보니, 현장 신청자들은 대부분 노인층이었다. 한 주민센터를 찾은 김건례(81)씨는 “주변 노인네들한테 듣고 왔다. 문자 같은 건 모른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집계를 보면, 16일 하루에 각 동 주민센터 현장 접수로만 5만9035명이 생활비를 신청했다. 서울시 자치구의 한 관계자는 “16∼17일 현장에서 접수한 이들 중 70% 이상이 60대 이상일 것으로 추산한다”고 말했다.
재난긴급생활비를 신청하러 온 노인들은 대개 얼마 되지 않는 불규칙한 수입이나 기초연금에 의지하던 이들이었다. 역촌1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난 73살 여성은 5년 동안 어렵사리 이어온 택시운전을 지난달 하순 그만둬야 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사납금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승객이 줄어서다. “2월부터는 2시간을 돌아다녀도 손님이 한 명도 없는 일이 흔했다”고 말했다. 40대 아들이 있지만 그 역시 프리랜서여서 코로나19 확산 이후 벌이가 거의 없다. 생활비는 둘째치고, 가족이 지고 있는 몇천만원의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하다고 했다. 2인 가구 기준 재난긴급생활비 30만원을 받아도 사용처는 식당, 마트 등으로 한정돼 있다. 그는 “금액이 얼마 되지도 않는 데 사용 제한 업종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당장 빚 갚는 일이 급한 이들도 있다”고 푸념했다.
서울시 재난긴급생활비 현장 접수가 시작된 16일 오전 서울 은평구 역촌동 주민센터에서 여러 주민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오류2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난 개인택시 기사 김아무개(68)씨도 “보통 하루에 20만∼30만원 정도 수입이 났는데, 3월부턴 하루에 4만원도 못 버는 날이 많다. 적자라서 당분간 운행을 안 할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촌1동 인근에서 트럭을 몰며 과일장사를 하는 박아무개(58)씨는 코로나19 이후 매출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긴급생활비가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민들에겐 한푼 한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기초연금 30만원이 유일한 수입이라는 이아무개(81)씨는 “수입은 없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사느라고 돈이 나간다. 생활비를 빨리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긴급생활비 신청조건을 잘 모르거나, ‘5부제’ 신청 일정을 몰라 허탕을 치는 시민들도 많았다. 중위소득 이하 가구 가운데 정부·서울시 등에게 받는 청년수당 등 지원을 받지 않는 시민만 긴급생활비를 신청할 수 있고, 공적마스크처럼 주민등록번호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요일별로 신청을 받는다. 16일 화곡1동 주민센터를 찾은 이경재(70)씨는 “1950년생인데, 오늘 주민등록번호 4·9로 끝나는 사람만 신청을 받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최아무개(70)씨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1인가구는 세전 소득이 170만원이 넘으면 안 된다고 한다. 경비업무를 하고 있는데, 나는 최저임금(올해 기준 한 달 179만5310원)을 받고 있어 못 받게 됐다”고 말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채윤태 박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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