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여성 직원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퇴를 선언한 오거돈 부산시장. 연합뉴스.
여성 직장인 ㅂ(31)씨는 회식 때 듣는 성희롱 발언에 이골이 났다. 여직원이 여럿 앉은 테이블을 향해 남성 직장상사가 “저쪽은 술맛 나겠네”라고 말하는 건 예사다. 고위 간부가 올 때마다 여직원들에게 한 명씩 그 옆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지시’가 내려질 땐 부아가 치민다. 30대 여성 직장인 ㄱ씨도 회식 때마다 “스스로 상품이 되는 듯한” 자괴감에 시달린다. 거래처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할 때면 양쪽 상사들이 경쟁하듯 ‘우리 애가 더 예쁘다’며 여성 직원들의 외모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오거돈 부산시장이 권력형 성범죄를 저질러 사퇴한 뒤 그가 과거 회식 자리에서 찍힌 사진이 거듭 입길에 오르고 있다. 2018년 11월 시청·산하기관 직원들과 모여 앉은 사진에서 오 시장이 젊은 여성 직원들 사이에 앉아 있는 사진이다. 남성 직원도 많은데 유독 여성 직원을 단체장 곁에 앉도록 한 성차별적인 모습에서 오 시장과 공무원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이 드러났다는 지적과 함께 “성차별적 회식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성토가 잇따른다.
숱한 ‘미투’ 폭로에도 불구하고 직장상사 옆에 여직원을 앉히는 성차별적 회식문화는 아직도 건재하다. 회식 자리에서의 성폭력 피해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도 꾸준히 들어오는 제보 중 하나다. 지난 2월에도 이 단체에는 술자리에서 남자 상사들이 계약직 여직원에게 안주를 준비하고 술을 따르도록 강요한 사례가 접수됐다. 여직원들은 ‘성적 수치심이 들었지만 계약에 불이익이 있을까 두려워 거부 의사를 밝히지 못했다’며 단체에 피해 사실을 알려왔다.
20~30대 여성 직장인들은 오 시장의 회식 사진에 분개했다. 여성 공무원 ㄴ(32)씨는 “사진 속 오 시장 옆에 앉은 직원들에게 감정이입됐다. 남자 상사가 여직원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을 때면 다른 남자 상사를 향해 ‘꽃밭에 앉아서 밥 먹을 맛이 난다’고 말한다”고 했다. 3년 전까지 은행에서 근무했던 ㄷ(30)씨도 “수직적인 조직에선 오거돈 전 시장 같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다. 회식에선 남자 상사의 외투를 받아들도록 시키기 일쑤였고 그들의 옆자리는 나를 포함한 여직원들이 앉게끔 항상 비어 있었다”고 돌아봤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남성 과장은 (회식에서) 어린 여성 레지던트나 인턴이 맡아야 했다’, ‘남성 선기장들은 여성 선원이 (회식에서) 멀찍이 자리하는 걸 못 견뎌 했다’는 등 의료계와 해운업계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회식에서 나를 성추행했던 상사가 오거돈 시장의 추행이 알려진 뒤 그를 욕하는 걸 보고 황당했다’고 털어놓은 글도 있다.
노동 전문가들은 회식 때 벌어지는 성차별적 발언이나 행동은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회식에서 사용자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은 관할 노동청에 직장 내 성희롱으로 신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조직 전체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성 직장인 ㅂ씨는 “중간 관리자가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아서 (성차별적으로) 회식 자리를 배치하는 경우도 많다”며 “다 같이 노력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윤경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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