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5일, 서울고법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경호 기자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에 대해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낸 기피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법관 기피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객관적 사정이 존재’할 때 소송 당사자가 해당 법관을 상대로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기피신청을 받아들이는 비율은 최근 5년간 채 1%를 넘지 않을 정도로 인용 가능성이 낮고, 검찰 쪽에서 기피신청을 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기소권자인 검찰이 사법체계의 한 축인 법원의 공정성을 의심해 법관 기피까지 하는 것은 검찰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특검은 “정 부장판사가 편향적으로 재판을 진행했음이 명백함에도 기피신청 재판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재항고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특검이 이렇게까지 정 부장판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뇌물·횡령 사건에 대한 법원 판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심급별 뇌물 인정액과 그에 따른 선고 형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1심:
89억 2227만원 뇌물 인정, 징역 5년
2심: 36억 3484만원 뇌물 인정,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
3심:
86억 8081만원 뇌물 인정, 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
보시는 것처럼 2심(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 재판부는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진동)과 달리 이 부회장의 뇌물 인정 액수를 절반 이상 깎았습니다. 또 “이 부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겁박에 뇌물을 수동적으로 건넸고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도 없었다”며 수감 중이던 그를 집행유예로 풀어줬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 등에게 공여한 뇌물은 삼성 ‘경영권 승계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보아, 부정 청탁을 인정하지 않은 2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는 판단을 내놓습니다. 대법원과 비슷한 취지로 1심이 징역형을 선고했듯, 파기환송심에서도 이 부회장의 실형 선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우세해졌던 이유입니다. 1+1은 2가 돼야 하니까요.
파기환송심을 맡게 된 서울고법 형사1부도 이러한 대법원 판단이 나온 이상, 환송심에서는 ‘양형 심리’에 집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검찰과 변호인 쪽 공방을 듣고 범죄 유형과 양형의 가중, 감경 사유 등을 두루 종합해 범죄사실에 적정한 수준의 양형을 선고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판장인 정 부장판사가 이 부회장 쪽에 새로운 ‘제안’을 하면서 논란이 시작됩니다. 지난해 10월 첫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미 연방 양형기준을 예로 들며 ‘기업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삼성그룹도 내부 감시를 위한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것이 발단입니다. 3개월 뒤인 지난 1월9일 삼성은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내세운 준법감시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이에 발맞추듯 정 부장판사는 약 1주일 뒤인 17일에 열린 재판에서 준법감시위를 ‘양형 조건’으로 고려하기 위해 법원과 특검, 변호인 추천으로 구성된 전문 심리위원단을 꾸려 그 실효성을 살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재판부가 명분을 만들어 이 부회장의 집행유예를 유지하려는 ‘심증’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입니다. 재판부는 지난 2월 이 부회장의 범죄수법의 불량성과 그가 제공한 뇌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즉 양형의 ‘가중’ 사유가 될 수 있는 특검 쪽이 신청한 증거 채택은 모두 기각하면서 이런 의심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장으로 내정된 김지형 법무법인 지평 대표가 지난 1월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결국 특검은 정 부장판사가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며 기피신청을 내게 됩니다. 정 부장판사가 미국의 ‘기업 보호관찰제도’ 격인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곧 이 부회장 개인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를 예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심리한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배준현)는 “정 부장판사가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예단을 가지고 소송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며 특검의 기피신청을 기각했습니다(관련 기사:
법원 “이재용 재판부, 편향적 아냐”…특검 기피신청 기각). 준법감시위에 대해서도 “이 부회장 등이 제출한 방안이 기업 총수와 고위직 임원들의 비리까지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실효적인 것으로 인정될 때 양형 사유로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을 뿐”이라며 “어느 일방에 편파적으로 양형 심리를 진행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최종 판단의 몫은 국정농단 사건처럼 다시 대법원으로 돌아갔습니다. 특검이 기피신청 기각에 “수긍할 수 없다”며 재항고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이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에 관한 부정한 청탁에 대해 필요한 심리를 하지 않은 원심의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파기환송심 재판부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양형 심리는 건너뛴 채 이 부회장 쪽에 유리한 사정(준법감시위)만을 감형 수단으로 삼는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 특검의 입장입니다. 실제로 이 부회장 쪽도 재판부에 “준법감시위를 감형 사유로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이미 제출했습니다.
대법원이 이 부회장의 혐의를 폭넓게 인정했을지라도, 판사의 독립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우리 법체계에서 특정 법관의 공정성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입니다. 지금으로선 대법원 판단을 기다려 보아야 하겠지만 그 기간 동안 이 부회장의 재판은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는 사이 이 부회장은 오는 5월1일,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동일인 변경을 통해 삼성그룹 총수에 오른 지 2주년을 맞게 됩니다. 삼성그룹의 불안정한 총수 리스크는 언제쯤에나 해소될까요.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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