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전기 헌정받은 이규상 목사
7일 오후 2시 서울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이규상(81) 목사의 전기 <민중과 함께 예수의 길을 따라 걷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규상목사회고록출판위원장을 맡은 권호경 라이프오브더칠드런 이사장을 비롯해, 오용식 목사, 손학규 전 경기지사,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이 책은 이 목사가 직접 쓰거나 구술한 회고록이 아니다. 설교문 일부를 빼고는 모두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규상 이야기’다. 이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심장병 수술(2002년) 이후 투병 생활 중이며 최근에는 상태가 악화돼 구술도 힘든 상태다. 이 목사는 이날 밝은 표정으로 참석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짧게 인사를 나눴다.
이 목사의 삶은 “민중과 함께 예수의 길을 따라 걷다”는 책 제목을 닮았다. 그는 1967년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하자 마자 산업선교를 위해 인천에 있는 대성목재에 노동자로 입사했다. 교회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노동자 등을 적극 도와야 한다는 대학 때의 배움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신대는 문동환, 정하은 등 젊은 교수들이 개신교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목사는 대성목재에서 노조를 직접 조직하기도 했으며, 이국선 목사가 만든 동인천도시산업선교센터에서도 활동했다.
1971년부터는 박형규 목사가 “빈민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지향하는 선교활동을 위해” 만든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에 합류해 활동했다. “교회는 눌린 자를 억압에서 해방하고 모순적인 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이다”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의 설립취지문은 이 목사가 대학 때부터 가슴 속에 품었던 생각이기도 했다. 이 시절 그는 이철용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주인공인 허병섭 목사와 단짝으로 지냈으며, 학생운동권 출신의 제정구, 손학규,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 등과도 친했다. 1975년 이규상, 허병섭, 이철용 등이 철거민들을 위해 이문동 공터에 천막으로 세운 ‘사랑방 교회’는 당시 도시빈민 운동의 상징이었으며, 당시 전도사였던 이 목사가 담임목사역을 맡았다.
60년대 한신대 나와 산업선교 헌신
빈민운동 상징 ‘사랑방교회’ 이끌어
74년 박정희 긴급조치 첫 저항운동
2002년 심장 수술 이후 오랜 투병
이해학·이철용 등 동료 회고글 모아 권호경 출판위원장 등 50명여명 축하
이 목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동료와 후배들을 소리없이 챙기는 ‘바우’(바위의 사투리)처럼 듬직한 존재였다. “규상 형은 선친이 목회자였기에 교회의 음과 양을 다 체험한 달인이었고 우리는 풋내기였다. … 그는 우리 가운데 입이 바우처럼 가장 무거웠다.”(이해학) “사랑방 교회가 설립되기까지 처음부터 협력하고 관여했던 이 목사의 공로는 매우 컸다. …자신을 내세우거나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에는 어짐과 덕, 그리고 믿음이 충만했다.”(이철용)
이 목사는 민주화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74년 1월8일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조차 내지 못하도록 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을 때였다. 1월17일 김진홍, 이해학, 이규상, 김경락, 인명진 등 젊은 성직자들은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긴급조치 철회와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주도했다. 긴급조치 1호에 대한 최초의 저항운동이었다. 이 일로 그도 다른 참여자와 함께 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치안본부(현 경찰청)가 눈엣가시 같았던 수도권선교위원회를 공산주의자로 몰기 위해 벌인 용공조작 사건 때(1976년 5~6월)도 주모자로 찍힌 박형규 목사와 함께 이 목사는 남산의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한 달 동안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캐나다 선교단체의 초청 등 ‘따스한’ 길을 마다하고 낮은 곳에서 조용히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1982년 경기 의정부의 은평교회에 이어 1986년부터는 서울 삼전동의 초강교회 담임목사로 일했다. 둘 다 작은 교회였지만, 청년들은 유독 많았다. 교회의 외형 키우기보다는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었다. 이때 만난 3명은 아직도 그를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청하는 삶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지요. 그러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살기는 참 벅찬 일입니다. 가진 것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신 그 목회자의 길이 실은 두렵습니다.” (1983년 <매일경제> 인터뷰) 그는 이러한 자신의 말대로 살았다. 심장 수술을 받은 이듬해인 2003년 목회활동을 접을 때 신도들은 교회 재산을 정리하고 남은 돈의 일부를 그에게 치료비로 건넸지만, 이 목사는 “교회 재산은 교회에 써야 한다”며 거절했다. 재산이 하나도 없는 그는 은퇴 목회자들의 생활 공동체인 경기도 화성의 ‘광명의집’에서 부인(고순희)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7일 투병 중인 이규상 목사가 지인들에게 헌정받은 자신의 전기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7일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이규상 목사 전기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빈민운동 상징 ‘사랑방교회’ 이끌어
74년 박정희 긴급조치 첫 저항운동
2002년 심장 수술 이후 오랜 투병
이해학·이철용 등 동료 회고글 모아 권호경 출판위원장 등 50명여명 축하
이규상 목사는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 이후 첫 시국선언을 주도해 ‘기독교 성직자 사건’으로 구속돼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오른쪽부터 김진홍·이해학·이규상(전도사)·인명진 목사. <한겨레> 자료사진
7일 이규상 목사 전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이 목사와 함께 했다. 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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