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바람과도 같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고, 힘이 있다는 점에서다. 과거 불의한 국가폭력에 맞서 싸울 때, 우리에겐 노래가 있었다. 사람들은 노래 위에 자신들의 울음을 포개 위안을 얻고, 연대하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뎌냈다. 여기 두명의 가수가 있다. 저마다의 시작은 달랐지만, 다시 찾아온 ‘오월’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광주를 노래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그들을 만났다.
5·18 40주년을 기념해 <한국방송1>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임을 위한 노래’에서 김형석 작곡가가 편곡한 ‘2020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가수 이은미를 13일 만났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그해’ 봄, 단발머리 중학생 소녀에게 방송은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뉴스에선 폭도들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군인들이 이를 진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또다시 몇달 뒤, “‘광주사태’의 배후에는 ‘김대중 일당’이 있다”는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계엄사령부의 수사 결과가 보도됐다. 1980년, 서울에 사는 소녀의 머릿속엔 ‘광주’ ‘폭도’ ‘폭동’ ‘내란음모’ 등과 같은 단어가 깊게 새겨졌다.
특수학교 교사를 꿈꾸던 소녀가 다시 광주를 떠올린 것은 재수를 할 때였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그해’ 광주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해줬다. 믿기지 않았다. ‘폭도’ ‘폭동’ ‘내란음모’가 아니었던가. 친구들은 그날의 참혹함을 담은 사진도 보여줬다. 진실은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그 감정이 전부였다. 무언가를 도모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서울 신촌의 한 작은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다가 1989년 음악 그룹 신촌블루스의 객원가수로 참여하게 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맨발의 디바’ 이은미의 시작이었다.
‘80년 5월’에 대한 부채의식은 성인이 된 그를 늘 따라다녔다. “당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한 분들과 달리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티비에스>(TBS)에서 만난 이은미의 표정에서는 회한이 묻어났다. 돌이켜 보면 그는 어느 순간부터 권력에 저항하고,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받거나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편에 서서 노래하고 있었다. ‘방송 3사 연대파업’ ‘세월호 추모문화제’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검찰개혁 촛불문화제’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5·18은 예외였다. 그는 “관련 추모행사나 공식 행사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5·18 40주년을 기념해 <한국방송1>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임을 위한 노래’에서 김형석 작곡가가 편곡한 ‘2020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가수 이은미를 13일 만났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그런 그에게 선물처럼 노래가 찾아왔다. 지난달 작곡가 김형석씨와 <한국방송>(KBS) 쪽으로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불러보자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른바 ‘2020 임을 위한 행진곡’. 김형석씨가 5·18 40주년을 맞아 새롭게 편곡한 노래다. 이 곡은 18일 저녁 7시40분 한국방송 1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임을 위한 노래>를 통해 공개된다. “행진곡, 투쟁가 같은 기존 느낌과 조금 다를 거예요. 현악기도 많이 사용했고요.” 음원 수익은 전액 기부돼 5·18 피해자들을 위해 쓰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4월 세상에 나왔다. 당시 광주에서 문화운동을 하던 소설가 황석영씨 집에서 가정용 소형 카세트로 녹음했다. 1980년 5월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운동을 하다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가사는 백기완의 장편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씨가 붙였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 세종시문화재단 대표가 곡을 썼다. 이은미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이 카세트테이프 녹음본을 접했다고 했다. “소리가 새 나갈까봐, 거실 유리창을 담요로 가리고 녹음했다고 들었어요. 들킬까봐 숨어서 만들고 꼭꼭 감추며 부르던 노래가 들불처럼 번져 지금까지 온 거예요. 우리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노래니까 더 슬플 수밖에 없죠.”
5·18 40주년을 기념해 <한국방송1>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임을 위한 노래’에서 김형석 작곡가가 편곡한 ‘2020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가수 이은미를 13일 만났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31년차 가수지만 지난 세월 수많은 역사의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한 노래를 다시 부른다는 것에 부담은 없었을까.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곡이라 중압감이 컸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큰 영광이죠. 저는 사라지더라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영원히 남을 테니까요.”
그는 자신의 노래가 희생자뿐 아니라 여전히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그 가족들에게 잠시나마 평안과 위로를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리고 말했다. “40년이 되도록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커녕 그들이 기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로 일관하는 모습에 너무 화가 나요. 저는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좋은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말씀처럼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없는 세상,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러운 나라. 그런 나라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줬으면 좋겠어요.” 오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봄이 오면 먼 벌판의 불빛, 먼 벌판의 뼈, 먼 벌판의 나무, 우리 모두 아픔이어라…우리 모두 노래이어라
5·18 40주년을 맞아 새 디지털 싱글 ‘봄이오면’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을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노래는 벼락처럼 찾아왔다. 지난달 어느 이른 아침이었고, 한편의 시를 읽고 나서였다. 봄이 오는 산천의 풍경을 표현한 시가 내내 마음을 울렸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접 표현한 대목이 없는데도, 희생자의 넋과 그날의 아픔이 느껴졌다.
“봄이 오면 먼 산의 바람/ 먼 산의 구름, 먼 산의 꽃/ 모두 우리 님이어라/ 모두 우리 가슴이어라/ 봄이 오면 먼 벌판의 불빛/ 먼 벌판의 뼈, 먼 벌판의 나무/ 모두 우리 아픔이어라/ 모두 우리 노래이어라.” 김준태 시인이 쓴 <노래>라는 시였다. 시인은 1980년 5월의 참상을 고발하고 싸움과 부활의 의지를 담은 통곡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로 5·18 민주화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봇물 터지듯 노래가 나왔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노래를 만들었죠. 그러고는 연락처를 수소문해 선생님(김준태)께 전화를 드렸어요. 이 시로 노래하고 싶다고. 흔쾌히 허락해주시더라고요.”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 작업실에서 만난 안치환의 표정은 아우성이 멎은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시인의 시를 온전히 담은 새 노래 ‘봄이 오면’을 지난 8일 세상에 내놨다.
5·18 40주년을 맞아 새 디지털 싱글 ‘봄이오면’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을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시인의 시에서 안치환이 주목한 단어는 ‘뼈’였다. “이 한 음절의 단어 때문에 사람들이 시를 읽을 때 5·18을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5·18은 아픔과 죽음의 역사고 ‘뼈’는 그것을 가장 잘 상징한다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시인의 아내는 ‘뼈’라는 단어가 노랫말로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대중성을 생각했을 때, ‘먼 벌판의 뼈’ 대신 ‘먼 벌판의 사람’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대요. 그런데 저는 ‘뼈’가 좋거든요. 그 말씀을 드리니 선생님께서도 흡족해하시더라고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안치환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경기도 평택에 살았고,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고등학생이 돼 서울로 전학을 가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노래’였다.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다. 1984년 연세대에 입학해 노래패 ‘울림터’에 들어갔다. 대학가요제를 목표로 하는 동아리가 없어서 대신 찾아간 그곳에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80년대 대학 캠퍼스는 5·18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상황이었어요. 노래패에서 알게 된 오월 광주와 그곳에서 접한 노래들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지만, 스펀지처럼 그런 것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저항가수’ 안치환의 시작이었다.
5·18 40주년을 맞아 새 디지털 싱글 ‘봄이오면’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을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5·18 관련 노래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타이틀 곡으로 담긴 5집 앨범 <디자이어>에 실린 ‘한다’라는 노래가 있었다. “과거를 잊지 마라 절대 잊지 마라/ 반역자에겐 학살자에겐 용서는 없다/ (중략) / 그들을 정의의 제단 앞에 세워야 한다/ 그들을 오월영령 앞에 세워야 한다”는 노랫말로 채워진 곡이다. “5·18은 거대한 주제이자 아픔이고 역사예요. 이를 감히 노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1990년대 말, 5·18 20주년을 앞두고 가수로서 또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겨우 만든 노래가 ‘한다’예요.”
‘봄이 오면’은 ‘한다’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5·18을 노래한다. ‘한다’가 5·18을 폭력으로 진압한 신군부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강렬한 록 사운드와 함께 직접적인 가사로 처절하게 표출했다면, ‘봄이 오면’은 발라드풍의 멜로디에 말을 아낌으로써 5·18을 보듬는다. “이번 노래는 울부짖지도, 처절하지도 않아요. 앞서 ‘한다’가 있었으니, 40주년을 앞두고선 무언가 승화된 느낌을 주는 이런 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더욱이 광주를 노래한 어른의 ‘시’인 만큼 제가 더 기댈 수 있었죠.”
하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지난 40년 동안 해결된 것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이내 울분을 터트렸다. “책임져야 할 자에게 책임을 묻고, 명예를 되찾아야 할 이들의 명예를 찾아주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가 다시 5월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