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화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장이 22일 서울 영등포구 아하센터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지난 22일 ‘포괄적 성교육 권리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포괄적성교육네트워크)는 유은혜 교육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포괄적성교육네트워크는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초등성평등연구회’ 등 성교육 관련 단체 17곳의 연대단체다. 이들은 텔레그램 엔(n)번방 사태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교육부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또 교육계와 여성계가 지속적으로 폐기를 요구해온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어떤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엔번방 디지털 성착취 사태에서 10대 청소년들이 주요 가해, 피해자로 수면 위에 오르면서 청소년 성교육 강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2001년부터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를 이끌며 청소년 성교육과 성상담을 해온 이명화 센터장에게 청소년 성문제 실태와 성교육 개선 방향에 대해 들었다.
―최근 <인간수업>이라는 드라마가 ‘엔번방’ 사태를 연상시키는 청소년 성착취를 소재로 삼아 화제가 됐다. 보셨다면, 실제 현실의 문제들이 드라마에 반영됐다고 생각하나?
“주목할 건 청소년 문제가 주제인데 ‘19금’이라는 점이다. 청소년 문제는 결국 어른의 문제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사실 상담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청소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아이를 상담센터에 던져놓듯 보내고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을 만날 때다. 극적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관계설정에 과도한 부분이 있지만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 있다. 최민수씨가 맡은 이왕철을 보면서 2015년 관악 청소년 성착취 살인사건의 젊은 포주가 떠올랐다. 채팅앱으로 여중생 성매매를 알선하고 모텔 주변에서 보호자를 자임하며 기다리다 나오지 않자 피해 청소년의 시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이다. 또 주인공 청소년이 성매매 알선으로 번 돈을 가져가는 집 나간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오래전 부모의 방치로 청소년 자매가 몇년 동안 성매매로 살아갔던 사례가 있었다. 언니가 성매매를 할 때마다 무서워서 동생을 데리고 나가 근처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런데 가끔 집에 오는 엄마는 아이들이 번 돈을 가져갔다. 이처럼 청소년들이 성착취당하는 구조에는 늘 어른들이 있다.”
―엔번방 사태가 드러나면서 피해자와 주요 가해자 모두 미성년자가 많아서 충격을 줬다. 청소년들은 기존의 성폭력과 디지털 성폭력을 어떤 식으로 다르게 받아들이나?
“얼마 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피해자가 정신적 후유증을 느끼는 순서에서 불법촬영이 성추행 앞쪽에 있었다.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고 언제 피해물(증거)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피해자들에게 훨씬 더 가혹하다. 반면 가해자들은 죄책감을 못 느낀다. 강간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상담하다 보면 일대일 강간을 한 가해자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집단강간의 가해자들은 죄책감이 훨씬 약하다. 쟤도 하고 나도 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게다가 성교육은 성폭력이 동의 없이 상대방의 신체를 ‘만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디지털 성폭력의 개념이 없고 그냥 놀이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해자 안에서도 피·가해가 공존한다. 최근 상담 내용 가운데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에 멋모르고 아는 여자 사진을 보내라고 해서 보냈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안 보내면 유포하겠다고 협박을 해서 계속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해 행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음에도 그 순간 청소년에게 떠오르는 지지 체계가 없었다는 의미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에 성인지 감수성에 기반한 학교 성교육 강화 대책도 언급되었다. 그런데 최근 초등학교 교사의 속옷 빨래 숙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선 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더 문제라는 비판도 나온다.
“늘 있어왔던 비판이다. 성폭력 사건만 나면 교사들을 교육하겠다는 정책 발표가 나오는데 교사들이라고 일반 시민과 크게 다르겠는가. 교사 간의 간극도 크고 연령별, 성별 차이도 있다. 온라인 개학 이후 원격수업에서도 성희롱이 자주 발생한다. 최근 상담 사례 가운데 교사가 출석 안 한 학생한테 전화를 했더니 학생이 자위하는 신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당황한 교사가 “뭐 하는 거냐, 그러면 안 된다”고 하고 끊은 뒤 학교에 이 사항을 보고했는데 위에서는 애들이라 그런 건데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자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모든 성폭력은 젠더 기반의 폭력이고 이를 막으려면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져야 하는데 학교의 대응 또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최근 교사들도 매년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으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전체적 이해 수준이 올라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원양성과정과 임용고시에 성인지 감수성을 정식 과목으로 넣는 등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n번방에 분노하는 사람들 소속 회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역 9번출구와 10번 출구 사이에서 강남역부터 n번방까지 성폭력 규탄 이어말하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최근 초등 고학년이나 중학생들 사이에 성교육 사교육이 성행하고 있다. 그룹과외를 하듯 개인들이 돈을 모아 유명 성교육 강사를 초청해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2018년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런 사교육이 급격히 늘었다. 개인별 수업은 물론이고 태권도학원이나 영어학원 같은 데서도 일종의 서비스처럼 성교육 강사를 초청하기도 한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교육에 대한 요구가 절박한데 공교육의 장에서 성교육이 사실상 부재한다는 의미다. 일선 학교로 교육을 나가거나 센터에서 청소년들을 만나 궁금한 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제발 정자·난자 이야기는 빼주세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고 지금은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만 빼고 해주세요”라고 입을 모은다. 이 말은 학교에서 받는 성교육이 이것뿐이라는 거다.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만을 위한 사교육에 신경 쓰기보다 공교육에서 감당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공적 교육기관으로 학교에서 성교육이 제대로 안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육부 장관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에도 썼지만 교육당국은 성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말만 할 뿐, 무엇을 어떻게 강화할 건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폐기 요구가 거센 2017년 ‘학교 성교육 표준안’에 대한 개선책 논의도 알려지는 게 없다. 몇가지 사례가 이미 공개됐지만 이 표준안에는 성별 이분법 강화, 성폭력에 대한 피해자 유발론 등이 담겨 있다. (초등 저학년용 교재 예시를 보여주며) 올바른 옷차림을 묻는데 짧은 셔츠와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과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남학생이 오답이다. 바른 옷차림의 여학생은 얌전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사회적 공론화 수준에도 못 미치는 표준안을 고수하는 것이다. 현장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현재 초중고의 의무 성교육 시간은 연간 15시간으로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국어 몇시간, 사회 몇시간, 보건 몇시간 등으로 시간을 채우는 식에 불과하다. 센터에서 일선 학교에 교육을 나가도 “동성애 문제는 언급 말아달라”거나
“섹스 이야기를 직접 하지 마라”는 주문이 많다.
일부 순결교육을 시키라는 학부모들의 민원공격 때문이다. 센터쪽으로 직접 항의해 “성교육이 섹스를 조장하는 거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공무원들은 민원이 들어오면 성가셔지니까 민원이 안들어 오게 하라고 하고, 일선 교육 현장은 청소년을 위한 교육의 본질 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조심하기 급급해 위축될 수 밖에 없다. 국가의 성교육정책이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
―현실적인 성교육에 대한 요구는 늘고 있는데 현실 청소년의 성과 양육자 사이의 성인식에 대한 간극은 여전히 큰가?
“문화적 지체라고 할 만한 정도다. 요새 ‘디지털 성폭력 예방을 위한 학부모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주제의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많은 부모들이 엔번방 사태에 개탄을 하면서도 기존 성폭력과 디지털 성폭력의 차이를 잘 모른다. 각종 성폭력성 언어들이 아이들 단톡방에서 일상처럼 이야기되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초등 단톡방에만 들어가도 엄마 엉덩이를 몰래 찍어서 올린다거나 ‘느금마’ 등 엄마를 비하하거나 여성혐오적인 언어들이 쏟아진다. 아이들은 유튜브 등에서 보고 흉내내며 장난으로 이런 행동을 시작하지만 이런 또래 문화를 통해 불법촬영에 익숙해지고 가장 가까운 여성인 엄마를 비하하면서 여성혐오를 익히게 된다. 우리 애들이 어떤 곳에서 놀고 있는지를 적어도 초등 때까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인식에서 개념과 실태를 알리는 매뉴얼을 준비하고 있다.”
안전한 옷차림이라는 성폭력 책임자 유발론을 담고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 성교육 교재의 한 장면.
―남자 청소년들의 여성혐오 문화가 더 빨라지고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 시절부터 디지털 문화 등을 통해 길러진 여성혐오가 결국 성폭력 가해자라는 결과를 낳고 있는 건지.
“엔번방 사태에서도 주요 가해자로 드러난 10~20대 남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남자 청소년들을 만나보면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고 교실 안에서도 ‘꼴페미’니 ‘메갈’이니 낙인찍으면서 혐오와 분노로 확장된다. 그 분노는 가장 약자인 10대 여성들로 향한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피해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하고 연대의식도 강해지면서 여자 청소년들도 자신들의 언어를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자 청소년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이나 젠더 감수성에 대해 이해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디지털 세계에서 또래 문화에 편승해 강간 문화만을 빠르게 흡수한다. 문제를 일으킨 남자 청소년과 상담을 하다 보면, 제대로 성교육을 받았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자주 든다. 독일은 우리의 여성가족부 같은 여성가족청소년노인부 안에 남자청소년 정책을 전담하는 ‘남자청소년성평등과’를 두고 있다. 우리도 남자 청소년을 위한 전문 프로그램을 개발해 획일적인 남성연대에 균열을 내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같은 남성이라도 다를 수 있다는 인식이 돼야 자신의 목소리를 획득할 수 있고 그래야 일방적인 가해자가 아닌 성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청소년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힘을 만들어주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30일 국회에서 ‘2020 성평등 문화 만들기 청소년 연설 대전’을 여는 것도 이런 취지다.”
―성폭력 예방은 교육과 처벌뿐 아니라 성평등 문화가 자리 잡혀야 가능한 것인가?
“근본적으로 그렇다. 청소년 성문제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자본이나 계급 문제와도 뗄 수 없고, 사회 전반적 문화와도 나눠 생각할 수 없다. 유네스코가 권하고 전세계적인 추세인 ‘포괄적 성교육’은 성폭력 방지법이 아니라 인권과 젠더 평등에 기반해 섹슈얼리티의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측면을 고루 배우는 것이다. 단순히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교육은 한계가 많다. 성교육은 나를 알아가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전인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 10대까지 무성적 존재처럼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어 성경험을 하는 20대들이 겪는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너무나 많다. 만연한 데이트 폭력과 불법촬영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1년에 몇시간 이런 대책이 아니라 ‘포괄적 성교육’이 권하는 나선형 교육을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나가는 중장기적 국가 성교육 정책 마련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이명화 센터장은 누구?
1990년부터 ‘청소년 성교육’ 뛰어든 베테랑
이명화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아하센터) 센터장은 교육학을 전공한 뒤 1990년부터 와이엠시에이(YMCA) 청소년성교육상담실에서 청소년 성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본래 청소년 교육 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그는 19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추진 시민사회연대’와 1998년 청소년성보호법 제정운동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성교육 전문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정신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등 의학 정보 중심이던 성교육 프로그램들이 청소년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고민을 하면서 일선 교사들과 성교육교사회를 만들어 성교육 프로그램 제작과 성교육자 훈련 방법론 개발 등 다양한 성교육 활동을 펼쳐나갔다.
2001년부터 와이엠시에이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아하센터를 운영하면서 센터장을 맡았다. 아하센터는 8살부터 19살까지 신청을 받아 성 상담과 집단 성교육을 진행한다. 개원 이래 해마다 10만여명의 학교 안팎 청소년이 이곳에서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아하센터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청소년성문화센터는 전국에 59곳 있다. 이명화 센터장은 정부가 학교에만 청소년 성교육을 맡길 게 아니라 독일처럼 지역사회와 손잡고 성교육 인프라를 좀 더 광범위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