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권센터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현충원에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부역한 군인 56명의 명단을 발표하며 이장을 촉구했다. 4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제2장군 묘역에 있는 신태영 묘.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서울과 대전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두 현충탑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일제에 저항하다 순국한 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계신 현충원엔 ‘민족의 얼’과는 거리가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잠들어 있습니다. 제65회 현충일을 앞두고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는 4일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부역한 군인들이 56명이나 묻혀 시민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며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조속한 시일 내에 친일 군인을 포함한 친일파를 현충원에서 이장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군인권센터가 꼽은 56명 가운데 20명은 일본군, 36명은 일제가 만든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 복무했습니다. 특히, 만주군 가운데 14명은 ‘독립군 잡는 부대’인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군인권센터가 꼽은 이들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바탕으로 추려낸 ‘친일 군인’의 명단입니다. 일제에게 강제로 끌려가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제외하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숫자라고 설명합니다. 56명 가운데 일본 육군사관학교, 육군항공사관학교,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등 전문 군사교육기관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입학한 자가 52명입니다. 영관급(일본군 좌관급, 만주군 교관급)에 이른 이가 11명, 또 대령에 해당하는 대좌·상교까지 오른 이가 3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일제와 만주국으로부터 모두 23개의 훈장·기장까지 받았습니다.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하기엔 너무 적극적이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판단입니다.
친일 군인만 현충원에 묻힌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 아니었지만 친일 행위를 한 사람까지 고려하면 모두 68명이 현재 현충원에 안장돼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과 현충원 안장자 명단을 일일이 대조해 이런 숫자를 뽑아냈습니다. 여기엔 박정희 전 대통령 등도 포함돼 있습니다. 2009년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정부 기구인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가 공식 인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만 해도 11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독립운동 행적이 가짜로 밝혀지거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되면 현충원에서 나가야 합니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가 서훈 취소로 파묘된 사람으론 서춘, 강영석, 김응순 등이 있습니다. 2·8독립선언 조선유학생 대표 11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동아일보·조선일보 출신 서춘은 친일행위가 드러나 1996년 서훈이 박탈됐습니다. 그는 서훈이 박탈된 이후에도 무려 8년이나 현충원에 머물렀습니다. 후손들이 이장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전현충원 쪽이 2004년 서춘의 묘비를 뽑아버렸고, 그제서야 후손들은 이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친일 행위가 드러났지만, 현충원에 아직 버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일 월간지 등을 발간한 강영석은 독립운동단체 근우회 활동을 한 ‘애국지사’ 부인 신경애와 함께 대전현충원에 합장돼 있습니다. 배우자와 관련한 별도 법 규정은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올해 만100살을 맞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세상을 떠날 경우 현충원에 안장할지를 두고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는 6·25전쟁 무훈 등으로 태극무공훈장을 2차례 받아 국립묘지법이 규정한 현충원 안장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하지만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장교로 복무한 백 장군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고, 정부 친일진상규명위도 공인한 ‘친일 군인’입니다.
친일행위자들의 강제 이장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부라도 후손들이 동의하지 않는데 묘역을 파내거나 강제 이장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서춘의 경우처럼 묘비를 제거하는 정도로 ‘압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군인권센터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현충원에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부역한 군인 56명의 명단을 발표하며 이장을 촉구했다. 4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있는 김정렬 묘.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와 광복회 등은 친일파의 현충원 안장을 막고 이미 안장된 친일파를 강제 이장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들려 합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68명 전부를 이장하긴 어렵겠지만, 여야가 합의한 11명에 대해서라도 강제 이장을 추진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법이 개정된 뒤엔 정부가 서훈 취소를 결정하지 않아도 친일 행적만 인정받으면 현충원에서 강제 이장할 수 있게 됩니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들도 이러한 법안에 공감하고 있으며, 일부 야권 의원들도 동의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광복회가 조사한 ‘친일 행위의 국립현충원 안장 불가 및 이장, 단죄비 설치를 위한 법률(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질문에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통합당 지역구 당선자 84인 가운데 정진석, 박덕흠, 김태흠, 성일종, 임이자, 조해진 의원 등 43명이 찬성했습니다. 국민들도 ‘친일파 이장’에 대해 호의적인 편입니다. 지난 2일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만18살 이상 성인남녀 500명(총 통화 8765명, 응답률 5.8%)을 대상으로 현충원의 친일행위자 이장 공감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54%로 절반을 넘습니다.
강제 이장은 하지 않되, 친일 행적을 공적과 함께 묘비에 표기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방학진 기획실장은 “그건 차선책이다. 정부에서도 공인한 친일파 11명에 대한 강제 이장을 추진해보고 여야 합의가 안되거나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플랜비(B)로 추진해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은 새로운 직책을 맡으면 항상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습니다.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직책에 대한 책임감과 애국을 다짐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우리가 매년 6월6일 추모하는 대상이 ‘친일파’는 아닐 것입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