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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CIA 비밀요원이 된 중국군 포로

등록 2020-06-22 11:47수정 2020-08-02 17:14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6화 한국전쟁과 사람들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7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가 납득할 그림은 없다. 어쩌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상처가 깊은 전쟁이었다. 평가나 논쟁에 앞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러나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한겨레〉와 〈한겨레21〉에서 찾아보았다. 해설 김태권

인민군 징집 피해 숨어 있다
국군에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행
중립국 택해 브라질서 정신이상

대만을 택한 중공군 포로
숨죽여 산 에티오피아 군인
그리고 송씨의 고무신 하나

제3국으로 떠난 포로들 이야기부터 해보자.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남한도 북한도 겪어본 주인공은 ‘이념’에 넌더리가 난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단호히 중립국을 택한다. 도착은 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한겨레〉도 제3국행 포로에 관한 기사마다 〈광장〉을 언급했다. 현실은 소설과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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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세계

그들은 왜 고향을 등졌나. 제일 큰 이유는 가난이 싫어서였다. “서울에 살 때 집이 종로3가에 있었다. 그때 성매매 집결지였던 곳이다. 다시 돌아가 경제적 전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북한에 포로로 잡힌 후 제3국을 택한 ‘국군포로’ 송청기의 증언이다. 남한에 잡혀 있던 이른바 ‘반공포로’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단다. “그들에게 가난은 이데올로기의 선택보다 심각한 명제였다.” <한겨레21> 1995년 9월21일치의 기사다.

또 하나 이유는 전쟁의 상처 때문일 것이다.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는 쉴 새 없는 폭력의 무대였다.” 〈한겨레신문〉 1989년 6월7일치에 실린 ‘역사기행’ 글이다. 포로들은 ‘반공’수용소 대 ‘친공’수용소로 패를 갈라 싸웠다. 포로 출신으로 훗날 거제에 정착한 한상언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 수용소의 포로들이 일사불란하게 반공이거나 친공이지는 않았고 어느 파의 간부가 수용소의 헤게모니를 잡느냐에 따라 그 수용소의 빛깔이 정해졌다.” 이념을 명분 삼았지만, 정작 사상을 택할 권리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포로들은 서로를 죽였다. “유엔군의 방조 속에 좌우익 포로들의 주검을 기름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땅에 몰래 버렸다.” <한겨레> 2004년 6월24일치 기사에 실린 진장순의 회고다. “백주에 살인귀로 표변해 교살, 타살, 두개골 박살내기, 솜을 코에 막고 물을 부어 질식시켜 죽이기, 가슴에 뛰어올라 갈비뼈를 우적우적 밟아 죽이기.” 제3국을 택해 인도에 가서 산 현동화는 “살인행위를 나열할 뿐 (그때의 일을) 더 이상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3년 10월22일치 기사다.

제3국을 택했다고 악몽이 끝나지는 않았다. 북송을 거부한 포로 8천여명은 “또 한번 ‘편가르기’를 강요당한다.” 제3국을 택한 주영복씨처럼 “수용소 내 반공포로들이 자체 구성한 특공대에 끌려가 중립국행을 택한 이들의 이름을 대라며 20여일 동안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다 극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제3국을 택한 남한 포로와 북한 포로끼리 서로를 “프락치로 오해해 심각한 대립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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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 아닌 인도·브라질이었나

부자 나라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미국은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미국에 가까운 멕시코였다. 여차하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멕시코행도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의 난민캠프에 몇년이나 발이 묶여 있던 포로들은 “뜻하지 않게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이민 1세대가 되어버렸다.” 이들의 사연이 알려진 것은 <문화방송>이 1993년에 <76인의 포로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였다. 이후 10여년에 걸쳐 <한겨레>는 이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일부는 현지에서 탄탄한 기반을 잡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전쟁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신이상이 된 사람도 십수명이라 했다.

김남수의 사연이 눈에 띈다. “사실 그는 전쟁포로가 아니었다. 군대 근처엔 가본 적도 없다.” 2003년 7월10일치 기사다. “인민군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피신 중이었다. 그러다 국군과 유엔군에 잡혔다. ‘인민군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제 포로수용소행. 그의 부모는 그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모른 채 세상을 떴다.” 중립국을 택했다. “남수씨는 애초부터 이념엔 관심이 없었다.” 미국행이 무산되자 브라질에 갔다. 고독하게 살다 정신이상이 되었다. 살인 사건에 두번 휘말렸다.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가며 수십년을 보냈다. 사연이 알려진 후 한국 사람들의 주선으로 1993년에 귀국했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 정착했다. 함께 농사짓는 사람에 따르면 “마음씨 좋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지만 “대화를 안 한다, 아랍인가 어딘가 갔다 오셨다고 하는데 그런 거 물으면 엄청 싫어한다”고 했다. 김남수는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안 일어났다면 그의 삶은 어땠을까.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다녀와 쓴 글이 2008년 10월30일치 〈한겨레〉 ESC 지면 노동효의 칼럼에 실렸다. 이곳을 찾은 학생의 모습을 김은주가 찍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다녀와 쓴 글이 2008년 10월30일치 〈한겨레〉 ESC 지면 노동효의 칼럼에 실렸다. 이곳을 찾은 학생의 모습을 김은주가 찍었다.

1989년 6월7일치 〈한겨레신문〉에 거제 포로수용소를 다녀와서 쓴 ‘역사기행’이 실렸다. “제65수용소 경비막사 안벽에는 언제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한쪽 벽면의 작고 메마른 한국인들과 다른 벽면의 크고 위엄 있게 묘사된 외국인들.” 한때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작가 고종석이 거제 포로수용소를 다녀와 썼다. 사진은 김선규 기자.
1989년 6월7일치 〈한겨레신문〉에 거제 포로수용소를 다녀와서 쓴 ‘역사기행’이 실렸다. “제65수용소 경비막사 안벽에는 언제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한쪽 벽면의 작고 메마른 한국인들과 다른 벽면의 크고 위엄 있게 묘사된 외국인들.” 한때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작가 고종석이 거제 포로수용소를 다녀와 썼다. 사진은 김선규 기자.

화가 이쾌대도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수용소에서 아내 유갑봉을 보고 싶어 하며 그린 드로잉이라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쾌대는 전쟁 이전에도 아내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한겨레〉 2017년 9월7일치 기사에 이 그림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함께 갇혀 있던 후배 화가 이주영에게 이 그림을 넘기고 이쾌대는 북으로 향한다. 아내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화가 이쾌대도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수용소에서 아내 유갑봉을 보고 싶어 하며 그린 드로잉이라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쾌대는 전쟁 이전에도 아내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한겨레〉 2017년 9월7일치 기사에 이 그림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함께 갇혀 있던 후배 화가 이주영에게 이 그림을 넘기고 이쾌대는 북으로 향한다. 아내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화가 이쾌대는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 사랑하는 아내와도 헤어진 채 말이다. 이쾌대는 의용군에 입대한 일도 없고, 북한군에 끌려다니다가 남한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갔다고 한다. 그림을 잘 그리고 사람을 잘 사귀던 이쾌대는 수용소 안에서도 인망을 얻었다. 그런 그를 이른바 ‘반공포로’였던 다른 막사 사람들이 질투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그와 함께 지내던 화가 이주영에 따르면, 이쾌대는 제거 대상으로 찍혀 한 발짝도 막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해코지가 두려워 북한으로 향한 경우다. 이쾌대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화가 이주영의 아들 이영학의 증언이 〈한겨레〉 2010년 10월8일치에 실렸다. 촬영은 김종수 기자.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화가 이쾌대는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 사랑하는 아내와도 헤어진 채 말이다. 이쾌대는 의용군에 입대한 일도 없고, 북한군에 끌려다니다가 남한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갔다고 한다. 그림을 잘 그리고 사람을 잘 사귀던 이쾌대는 수용소 안에서도 인망을 얻었다. 그런 그를 이른바 ‘반공포로’였던 다른 막사 사람들이 질투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그와 함께 지내던 화가 이주영에 따르면, 이쾌대는 제거 대상으로 찍혀 한 발짝도 막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해코지가 두려워 북한으로 향한 경우다. 이쾌대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화가 이주영의 아들 이영학의 증언이 〈한겨레〉 2010년 10월8일치에 실렸다. 촬영은 김종수 기자.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중립국행을 택한 김남수. 브라질에서 수십년 동안 감옥과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의 주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말년을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지냈다. 그와 만나 나눈 이야기가 2003년 7월10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이종근 기자가 찍은 사진.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중립국행을 택한 김남수. 브라질에서 수십년 동안 감옥과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의 주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말년을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지냈다. 그와 만나 나눈 이야기가 2003년 7월10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이종근 기자가 찍은 사진.

“그의 정신은 ‘내가 없으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과대망상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을 무시로 오간다.” 꽃동네 안 옥수수밭에서 김남수를 만난 후 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가 평생 품고 산 상처의 깊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정신은 ‘내가 없으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과대망상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을 무시로 오간다.” 꽃동네 안 옥수수밭에서 김남수를 만난 후 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가 평생 품고 산 상처의 깊이는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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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노병의 문신

한국전쟁은 생각 못 한 곳에도 상처를 남겼다. 두번째 이야기는 대만 노병의 문신에 얽힌 사연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이때 중국공산당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도 군인으로 끌려나왔을 것이다. 국공내전이 끝난 직후였으니 말이다. 중국인 전쟁포로가 2만명이 넘었는데, 중국 본토에 송환되는 대신 대만으로 가고 싶다고 한 사람이 1만4천명이 넘었다. 그런데 대만은 대만대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장제스 정부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부터 대만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중국인 포로들이 도착한 1954년도 계엄 상태였다(계엄령은 1987년까지 38년 동안 이어진다).

한국전쟁 때 공산주의 군대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다. 얼마나 공산당을 싫어하는지 ‘신앙고백’을 해야 했다. 저마다 가슴이며 등이며 팔뚝에 대만 국기나 반공 구호 따위를 문신으로 새겨넣었다. <한겨레21> 2005년 1월4일치 기사에는 문신 새긴 노병의 팔 사진이 실렸다. 나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반세기 전 새긴 문신이라 흐릿하기도 하고 사전에 없는 한자도 있다. 윤성훈 박사의 도움을 받아 기사가 나간 지 15년 만에 사진 속 문신을 해독했다.

노병은 반공 표어 열여섯 자를 팔에 새겼다. “공산당과 러시아에 맞서자(反共抗俄)”, “나라 잃은 치욕을 복수하자(復國雪恥)”, “공비가 살면 내가 못 산다(有匪無我)”. 마지막 네 글자는 설명이 필요하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무시무시하다. 그때 대만에서 쓰던 반공 표어 가운데 “주더와 마오쩌둥을 죽이자(殺朱拔毛)”라는 문구가 있다. 주더와 마오쩌둥은 공산당 군대의 지도자였다. 발음이 “돼지 잡고 털을 뽑다(殺猪拔毛)”와 같다나. 그런데 사진 속 문신을 보면 주더(朱)와 마오쩌둥(毛)을 나타내는 글자에 특별히 개를 뜻하는 변을 붙여 사전에도 없는 글자를 만들어냈다. “개 같은 주더와 마오쩌둥을 돼지처럼 도살하자”는 어감일까. 이 소름 끼치는 말을 몸에 새기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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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투입되는 특수부대원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훗날 미국의 비밀 군사작전에 동원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정확한 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특수대대111’에는 한국전쟁의 포로였던 중국인이 일부 있던 게 사실이다.” 중앙정보국(CIA)요원이던 빌 영의 증언이 <한겨레21>에 실렸다.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이 특수부대는” 1960년대 이후에 “라오스 북부를 거점 삼아 라오스와 중국 본토에까지 투입됐다”고 한다. 빌 영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포로들이 국민당에 충성심을 과시하고, 또 그들 가운데 일부를 라오스 국경에 투입했을 때 중국 공산당 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몸에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그들이 문신을 새긴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였다.

증언이 사실일까. 나는 한 중국 남자를 상상한다. 이념에 관심 없던 이 사람. 그런데 새로 들어선 공산당 정부가 그를 한국전쟁에 내보낸다. 그는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된다. 풀려날 때가 되자 그는 고향을 등진 채 대만행을 선택한다. 몸에는 반공 구호를 문신으로 새겼다. 그런 그를 중앙정보국이 차출한다. 특수부대원으로 훈련을 받고 저 멀리 라오스 국경으로 떠난다. 자기가 등진 본토의 땅을 다시 밟는다. 그런 다음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일을 몇 사람이나 겪었을까. 이제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정부도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붙잡힌 중국인 포로 가운데 70%가 중국 본토로 돌아가는 대신 대만에 가서 살겠다고 했다. 중국 본토와 이념 대결을 벌이던 대만 정부는 이 사람들을 “반공의사”라 부르며 환영했다. 타이베이에 퇴역군인의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살 곳도 마련해줬다. 2005년 1월4일치 〈한겨레21〉에 실린 퇴역군인의 집 사진. ‘한국전쟁 제2전선’을 취재하던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가 찍었다.
한국전쟁 때 붙잡힌 중국인 포로 가운데 70%가 중국 본토로 돌아가는 대신 대만에 가서 살겠다고 했다. 중국 본토와 이념 대결을 벌이던 대만 정부는 이 사람들을 “반공의사”라 부르며 환영했다. 타이베이에 퇴역군인의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살 곳도 마련해줬다. 2005년 1월4일치 〈한겨레21〉에 실린 퇴역군인의 집 사진. ‘한국전쟁 제2전선’을 취재하던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가 찍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사로잡힌 후 대만으로 향한 중국 포로들은 자신의 ‘반공’ 이념을 증명하기 위해 몸에 반공 표어를 문신으로 새겨야 했다. 중국어 웹사이트를 찾아보면 팔과 가슴과 등에 각종 반공 선전물을 문신으로 새겨넣은 대만 노병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정문태 기자가 찍어 온 대만 노병의 팔 문신이다. 〈한겨레21〉 2005년 1월4일치에는 설명이 실려 있지 않아 15년 만에 해독해보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사로잡힌 후 대만으로 향한 중국 포로들은 자신의 ‘반공’ 이념을 증명하기 위해 몸에 반공 표어를 문신으로 새겨야 했다. 중국어 웹사이트를 찾아보면 팔과 가슴과 등에 각종 반공 선전물을 문신으로 새겨넣은 대만 노병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정문태 기자가 찍어 온 대만 노병의 팔 문신이다. 〈한겨레21〉 2005년 1월4일치에는 설명이 실려 있지 않아 15년 만에 해독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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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턱 없는 노인

에티오피아에는 코리안 빌리지가 있다. 이곳에 사는 “턱 없는 노인”이 세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무솔리니의 군대에 나라를 빼앗긴 적이 있다. 한참 지나 나라를 되찾을 때 국제사회가 도와줬다.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951년에 자신의 근위대를 한국 땅으로 보냈다. 칵뉴(강뉴) 대대는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격전지에서 싸웠는데도 “단 한명의 항복자는 물론, 단 한명의 포로로도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에 돌아오자 황제가 이들이 살 땅을 마련해줬다. 마을의 이름은 코리안 빌리지다.

그런데 1974년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황제가 쫓겨났다. 쿠데타 세력은 북한한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잘나갔고 아프리카에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의 근위대 출신에다 북한 군대와 죽고 죽였던 칵뉴 대대 사람들은 처지가 난처했다. 수십년 동안 숨죽인 채 살아야 했다.

이들을 만나고 온 이야기가 <한겨레21> 1994년 7월21일치에 실렸다. 〈한겨레21〉이 창간되고 몇달 되지 않아서였다. “에티오피아 한국전쟁 용사회를 찾아가자 모두들 인사 대신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물었고, 남한임을 확인하고도 쉽사리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위였던 엠래루는 이렇게 말한다. “난 사관학교 졸업식을 마친 다음날, 뜻도 까닭도 모른 채 남의 전쟁터로 갔다. (나중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우린 입도 뻥긋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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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나는 코리아, 코리아

코리안 빌리지에 살던 칵뉴 대대 사람 대부분은 박해받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가난한 함테기욜기스 노인은 남아 있었다. “네댓평 남짓한 판잣집 구석구석을 아무리 따져보아도 재산은 소 두 마리와 한국전쟁에서 찍은 사진 한장이 전부였다. 이 소란 놈도 사실은 재산이 아니라 그의 절박한 생존 장비였다. 이 노인네는 금화전선에서 턱을 잃은 뒤 음식을 씹을 수 없어 40년이 넘도록 소젖으로 연명해왔다.” 사람들은 그를 “턱 없는 노인”이라 불렀다.

노인의 말은 지금 읽어도 마음이 무겁다. “축구든 뭐든 한국이 잘했다는 소식만 들리면, 속으로 코리아를 외치며 혼자 눈물짓는다”는 말도 나는 부담스럽고, “모조리 나쁜 놈들이다. 에티오피아 정부도, 한국 정부도, 유엔인가 하는 놈들도 모두… (내 잃어버린 인생에 대해) 한국이든 에티오피아든 유엔이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게 아닌가”라는 말도 슬프다. 기사가 나간 때는 1994년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에티오피아가 낯설다.

<한겨레21> 1994년7월21일치에는 "숨어사는 한국전쟁 용사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당시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취재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턱 없는 노인"으로 불리던 에티오피아의 함테기욜기스. 한국전쟁에서 턱을 잃고 40년을 소 젖으로 연명했다. 정문태 기자가 그의 사연을 &lt;한겨레21&gt; 1994년7월21일치에 소개했다.
"턱 없는 노인"으로 불리던 에티오피아의 함테기욜기스. 한국전쟁에서 턱을 잃고 40년을 소 젖으로 연명했다. 정문태 기자가 그의 사연을 <한겨레21> 1994년7월21일치에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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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자석의 보도연맹

네번째 이야기는 다시 한국 땅에서. 1988년은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해다. 그해 12월10일치 ‘독자기자석’에는 가슴 시린 글이 실렸다. “12월1일자 ‘국민보도연맹사건’에 관한 글을 읽고 떨리는 마음으로 몇 자 적어본다.” 〈말〉 12월호에 실린 보도연맹 학살사건 기사를 그날 〈한겨레신문〉이 일간지 지면에 소개한 것이다. “나는 이십여년 이상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의 어머니에게서 들어왔지만, 이 사건에 관한 글은 이번 〈한겨레신문〉의 몇 줄이 처음이다.”

“어머니가 12살 때인 1950년 여름, 경남 진양군 정촌면의 고향마을에서 동네 구장으로부터 ‘보도연맹에 가입하신 분들은 지서에서 회의가 있으니 꼭 오시랍니다’라는 말을 듣고, 외할아버지는 ‘무슨 회의지?’ 하시면서 논일을 멈추고 마을을 나섰다고 한다. (일주일쯤 후에 듣기로) 지역 일대의 어른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트럭에 실려 진주 쪽으로 갔는데 그 행렬이 상당히 길었다고 한다. 그때 꼭 외할아버지같이 생긴 분이 고개를 들고 들판을 바라보다가 감시원의 총 개머리판에 맞아 푹 쓰러지는 것을 친지가 보고 어머니께 들려줬다는 것인데 ‘바로 그 사람이 네 외할아버지가 틀림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많이 봤다.” 글을 보낸 사람은 중학교 교사던 김맹규. “그동안 유족들은 피해 당사자면서도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쉬쉬하며 살아왔다.”

그때 이후로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보도연맹 사건은 여전히 해결이 나지 않았다. 학살당한 사람의 수가 수만명인지 수십만명인지도 아직 모른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이이화는 2011년 3월15일치 〈한겨레〉에 “‘연좌제 사슬’에 평생을 옭매인 유가족들”이라는 칼럼을 실었다. 김영욱과 김광호, 박봉자, 서영선, 이계성 등 전국유족협의회에서 활동한 회원들의 절절한 사연을 소개했다. 글은 이렇게 끝난다. “범국민위와 유족회에는 누구를 가릴 것도 없이 구구절절한 사연이 가슴에 맺혀 있었다. ‘연좌제 사슬’에 걸려 취직도 사회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반세기를 숨죽여 살다 마침내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이들이었다. 그 모두가 시대가 만든 희생자들이었다.”

이 모두가 시대가 만든 희생자들이었다.

창간된 지 반년 남짓 지나 1988년 12월10일치 〈한겨레신문〉의 ‘독자기자석’에는 보도연맹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가슴 아픈 사연이 실렸다. “나는 이십여년 이상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의 어머니에게서 들어왔지만, 이 사건에 관한 글은 이번 〈한겨레신문〉의 몇 줄이 처음이다.” 〈한겨레〉는 그 후로도 수없이 관련 보도를 했다. 2020년이 된 지금도 사건의 진실은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2013년 7월9일에 보도연맹 희생자의 유족들이 대법원 앞에 모여 항의 기자회견을 했다. 대법원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이튿날 〈한겨레〉에 기사가 났다. 이때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박종식 기자의 사진을 찾아 이번에 소개한다. 곱게 머리를 빗은 할머니의 결연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2013년 7월9일에 보도연맹 희생자의 유족들이 대법원 앞에 모여 항의 기자회견을 했다. 대법원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이튿날 〈한겨레〉에 기사가 났다. 이때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박종식 기자의 사진을 찾아 이번에 소개한다. 곱게 머리를 빗은 할머니의 결연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내 숨을 멎게 한 사진은 산더미처럼 쌓인 희생자들의 안경과 신발 사진이었다. 보도연맹 학살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희생자의 시신은 한곳이 아니라 한반도 남쪽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다. 2018년 10월에 세종 연기면에서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시신을 발굴했다. 그때 나온 신발들이다. 신발 곁에서는 안경도 발견되었다.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김봉규 기자가 그때 찍은 사진을 찾아 이번에 소개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내 숨을 멎게 한 사진은 산더미처럼 쌓인 희생자들의 안경과 신발 사진이었다. 보도연맹 학살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희생자의 시신은 한곳이 아니라 한반도 남쪽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다. 2018년 10월에 세종 연기면에서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시신을 발굴했다. 그때 나온 신발들이다. 신발 곁에서는 안경도 발견되었다.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김봉규 기자가 그때 찍은 사진을 찾아 이번에 소개한다.

세종 연기면에서 발굴한 보도연맹 희생자의 검정고무신이다. 신발 주인이 송씨였던 걸까. 혹시 잃어버릴까 이름을 새겨가며 고무신을 아끼던 주인의 마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2018년 10월에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세종 연기면에서 발굴한 보도연맹 희생자의 검정고무신이다. 신발 주인이 송씨였던 걸까. 혹시 잃어버릴까 이름을 새겨가며 고무신을 아끼던 주인의 마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2018년 10월에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기획 팩트스토리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 실화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2017년 설립 이후 6편의 르포, 웹소설을 개발했고 2편이 영상 판권계약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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