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6화 한국전쟁과 사람들
제6화 한국전쟁과 사람들
한국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 7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가 납득할 그림은 없다. 어쩌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상처가 깊은 전쟁이었다. 평가나 논쟁에 앞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러나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한겨레〉와 〈한겨레21〉에서 찾아보았다. 해설 김태권
국군에 잡혀 거제 포로수용소행
중립국 택해 브라질서 정신이상 대만을 택한 중공군 포로
숨죽여 산 에티오피아 군인
그리고 송씨의 고무신 하나 제3국으로 떠난 포로들 이야기부터 해보자.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남한도 북한도 겪어본 주인공은 ‘이념’에 넌더리가 난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단호히 중립국을 택한다. 도착은 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한겨레〉도 제3국행 포로에 관한 기사마다 〈광장〉을 언급했다. 현실은 소설과 어떻게 다를까. ________________
포로의 세계 그들은 왜 고향을 등졌나. 제일 큰 이유는 가난이 싫어서였다. “서울에 살 때 집이 종로3가에 있었다. 그때 성매매 집결지였던 곳이다. 다시 돌아가 경제적 전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북한에 포로로 잡힌 후 제3국을 택한 ‘국군포로’ 송청기의 증언이다. 남한에 잡혀 있던 이른바 ‘반공포로’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단다. “그들에게 가난은 이데올로기의 선택보다 심각한 명제였다.” <한겨레21> 1995년 9월21일치의 기사다. 또 하나 이유는 전쟁의 상처 때문일 것이다.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는 쉴 새 없는 폭력의 무대였다.” 〈한겨레신문〉 1989년 6월7일치에 실린 ‘역사기행’ 글이다. 포로들은 ‘반공’수용소 대 ‘친공’수용소로 패를 갈라 싸웠다. 포로 출신으로 훗날 거제에 정착한 한상언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 수용소의 포로들이 일사불란하게 반공이거나 친공이지는 않았고 어느 파의 간부가 수용소의 헤게모니를 잡느냐에 따라 그 수용소의 빛깔이 정해졌다.” 이념을 명분 삼았지만, 정작 사상을 택할 권리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포로들은 서로를 죽였다. “유엔군의 방조 속에 좌우익 포로들의 주검을 기름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땅에 몰래 버렸다.” <한겨레> 2004년 6월24일치 기사에 실린 진장순의 회고다. “백주에 살인귀로 표변해 교살, 타살, 두개골 박살내기, 솜을 코에 막고 물을 부어 질식시켜 죽이기, 가슴에 뛰어올라 갈비뼈를 우적우적 밟아 죽이기.” 제3국을 택해 인도에 가서 산 현동화는 “살인행위를 나열할 뿐 (그때의 일을) 더 이상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3년 10월22일치 기사다. 제3국을 택했다고 악몽이 끝나지는 않았다. 북송을 거부한 포로 8천여명은 “또 한번 ‘편가르기’를 강요당한다.” 제3국을 택한 주영복씨처럼 “수용소 내 반공포로들이 자체 구성한 특공대에 끌려가 중립국행을 택한 이들의 이름을 대라며 20여일 동안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다 극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제3국을 택한 남한 포로와 북한 포로끼리 서로를 “프락치로 오해해 심각한 대립을 겪어야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왜 미국 아닌 인도·브라질이었나 부자 나라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미국은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게 미국에 가까운 멕시코였다. 여차하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멕시코행도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의 난민캠프에 몇년이나 발이 묶여 있던 포로들은 “뜻하지 않게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이민 1세대가 되어버렸다.” 이들의 사연이 알려진 것은 <문화방송>이 1993년에 <76인의 포로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였다. 이후 10여년에 걸쳐 <한겨레>는 이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일부는 현지에서 탄탄한 기반을 잡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전쟁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신이상이 된 사람도 십수명이라 했다. 김남수의 사연이 눈에 띈다. “사실 그는 전쟁포로가 아니었다. 군대 근처엔 가본 적도 없다.” 2003년 7월10일치 기사다. “인민군에 징집되지 않기 위해 피신 중이었다. 그러다 국군과 유엔군에 잡혔다. ‘인민군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제 포로수용소행. 그의 부모는 그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모른 채 세상을 떴다.” 중립국을 택했다. “남수씨는 애초부터 이념엔 관심이 없었다.” 미국행이 무산되자 브라질에 갔다. 고독하게 살다 정신이상이 되었다. 살인 사건에 두번 휘말렸다.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가며 수십년을 보냈다. 사연이 알려진 후 한국 사람들의 주선으로 1993년에 귀국했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 정착했다. 함께 농사짓는 사람에 따르면 “마음씨 좋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지만 “대화를 안 한다, 아랍인가 어딘가 갔다 오셨다고 하는데 그런 거 물으면 엄청 싫어한다”고 했다. 김남수는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안 일어났다면 그의 삶은 어땠을까.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다녀와 쓴 글이 2008년 10월30일치 〈한겨레〉 ESC 지면 노동효의 칼럼에 실렸다. 이곳을 찾은 학생의 모습을 김은주가 찍었다.
1989년 6월7일치 〈한겨레신문〉에 거제 포로수용소를 다녀와서 쓴 ‘역사기행’이 실렸다. “제65수용소 경비막사 안벽에는 언제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한쪽 벽면의 작고 메마른 한국인들과 다른 벽면의 크고 위엄 있게 묘사된 외국인들.” 한때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작가 고종석이 거제 포로수용소를 다녀와 썼다. 사진은 김선규 기자.
화가 이쾌대도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수용소에서 아내 유갑봉을 보고 싶어 하며 그린 드로잉이라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쾌대는 전쟁 이전에도 아내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한겨레〉 2017년 9월7일치 기사에 이 그림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함께 갇혀 있던 후배 화가 이주영에게 이 그림을 넘기고 이쾌대는 북으로 향한다. 아내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화가 이쾌대는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 사랑하는 아내와도 헤어진 채 말이다. 이쾌대는 의용군에 입대한 일도 없고, 북한군에 끌려다니다가 남한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갔다고 한다. 그림을 잘 그리고 사람을 잘 사귀던 이쾌대는 수용소 안에서도 인망을 얻었다. 그런 그를 이른바 ‘반공포로’였던 다른 막사 사람들이 질투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그와 함께 지내던 화가 이주영에 따르면, 이쾌대는 제거 대상으로 찍혀 한 발짝도 막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해코지가 두려워 북한으로 향한 경우다. 이쾌대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한 화가 이주영의 아들 이영학의 증언이 〈한겨레〉 2010년 10월8일치에 실렸다. 촬영은 김종수 기자.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중립국행을 택한 김남수. 브라질에서 수십년 동안 감옥과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의 주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말년을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지냈다. 그와 만나 나눈 이야기가 2003년 7월10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이종근 기자가 찍은 사진.
“그의 정신은 ‘내가 없으면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과대망상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을 무시로 오간다.” 꽃동네 안 옥수수밭에서 김남수를 만난 후 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가 평생 품고 산 상처의 깊이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전쟁 때 붙잡힌 중국인 포로 가운데 70%가 중국 본토로 돌아가는 대신 대만에 가서 살겠다고 했다. 중국 본토와 이념 대결을 벌이던 대만 정부는 이 사람들을 “반공의사”라 부르며 환영했다. 타이베이에 퇴역군인의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살 곳도 마련해줬다. 2005년 1월4일치 〈한겨레21〉에 실린 퇴역군인의 집 사진. ‘한국전쟁 제2전선’을 취재하던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가 찍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사로잡힌 후 대만으로 향한 중국 포로들은 자신의 ‘반공’ 이념을 증명하기 위해 몸에 반공 표어를 문신으로 새겨야 했다. 중국어 웹사이트를 찾아보면 팔과 가슴과 등에 각종 반공 선전물을 문신으로 새겨넣은 대만 노병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정문태 기자가 찍어 온 대만 노병의 팔 문신이다. 〈한겨레21〉 2005년 1월4일치에는 설명이 실려 있지 않아 15년 만에 해독해보았다.
"턱 없는 노인"으로 불리던 에티오피아의 함테기욜기스. 한국전쟁에서 턱을 잃고 40년을 소 젖으로 연명했다. 정문태 기자가 그의 사연을 <한겨레21> 1994년7월21일치에 소개했다.
2013년 7월9일에 보도연맹 희생자의 유족들이 대법원 앞에 모여 항의 기자회견을 했다. 대법원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이튿날 〈한겨레〉에 기사가 났다. 이때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박종식 기자의 사진을 찾아 이번에 소개한다. 곱게 머리를 빗은 할머니의 결연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내 숨을 멎게 한 사진은 산더미처럼 쌓인 희생자들의 안경과 신발 사진이었다. 보도연맹 학살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희생자의 시신은 한곳이 아니라 한반도 남쪽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다. 2018년 10월에 세종 연기면에서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의 시신을 발굴했다. 그때 나온 신발들이다. 신발 곁에서는 안경도 발견되었다. 지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김봉규 기자가 그때 찍은 사진을 찾아 이번에 소개한다.
세종 연기면에서 발굴한 보도연맹 희생자의 검정고무신이다. 신발 주인이 송씨였던 걸까. 혹시 잃어버릴까 이름을 새겨가며 고무신을 아끼던 주인의 마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2018년 10월에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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