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겨레 자료사진.
이른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에 연루돼 간첩으로 몰려 기소된 노동운동가 고 심진구씨의 재심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위증한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수사관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0단독 변민선 부장판사는 위증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옛 안기부 수사관 구아무개(76)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고 25일 밝혔다.
변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1986년 심씨에게 가혹 행위를 저지른 뒤 무려 34년간 자신의 범죄에 대해 심씨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진술을 수시로 바꾸면서 법의 심판을 피하려 했다. 오히려 심씨와 그 배우자 진술이 허위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변 부장판사는 구씨가 고령에 인지장애와 지병이 있다면서도 실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변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심씨에게 저지른 가혹 행위는 공소시효 완성으로 더는 처벌할 수 없게 됐다”면서도 “심씨는 생전 구씨 등 안기부 수사관들의 고문으로 정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가혹 행위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현재 사망한 상태로 구씨로부터 진심 어린 참회나 사죄를 받을 기회조차 없다”고 밝혔다.
서울 구로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심씨는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영환(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씨와 가까이 지내며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라는 제목의 문건을 집필했다가 1986년 12월 안기부로 연행된 뒤 37일간 불법구금을 당했다. 당시 구씨를 포함한 수사관들은 이적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자백받으려고 심씨를 폭행하거나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고문을 가했다. 구씨는 1987년 2월 심씨에게 기소유예를 조건으로 방송에 출연해 운동권을 비난해달라고 요구했고, 심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석방을 기대하며 촬영에 응했다. 이 촬영분은 <문화방송>(MBC) 보도특집 ‘나는 후회한다’는 프로그램과 <한국방송>(KBS1) ‘수인번호 30의 고백’이라는 프로그램에 방송됐다. 법원은 이런 심씨의 허위 자백에 기초해 그에게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2012년 재심 끝에 무죄를 확정받은 심씨는 2014년 별세했다.
구씨는 심씨의 재심사건에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해 구타와 협박 등 가혹 행위나 고문을 가하지 않았다며 “심씨가 수사기관에서 자백해 다툼이 없었다”고 위증한 혐의로 기소됐다.
변 부장판사는 심씨가 1999년 월간지 ‘말’에 폭로한 가혹 행위 주장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 진술 등을 바탕으로 구씨 등 수사관들이 심씨에게 가혹 행위나 고문을 가한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변 부장판사는 “구씨가 법정에서 ‘심씨를 고문하지 않았고, 다른 수사관들도 고문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은 기억에 반하는 허위의 진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심씨는 출소 뒤 자신이 당했던 고문을 언론 등에 폭로하고, 2004년에는 안기부 수사관들로부터 가혹 행위나 고문을 받았다며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도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공소시효 완성을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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