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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조희연 “‘40년 친구’ 박원순을 기억한다”

등록 2020-07-13 04:59수정 2022-03-17 12:09

[가신이의 발자취] 고 박원순 시장을 보내며
고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왼쪽)은 1980년대 초부터 시민운동에 이어 공직 활동까지 줄곧 함께 해왔다. 두 사람이 2018년 6월 제9대 서울시의회 마지막 정례회의에 참석해 방청 시민들에게 나란히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고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왼쪽)은 1980년대 초부터 시민운동에 이어 공직 활동까지 줄곧 함께 해왔다. 두 사람이 2018년 6월 제9대 서울시의회 마지막 정례회의에 참석해 방청 시민들에게 나란히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
1980년대 학술운동 초기부터 ‘인연’
인권·환경·역사정의·투명성…
함께하자고 했던 무수한 약속들…
회한·논쟁 속 ‘문제적 죽음’ 난제로

오랜 벗 박원순이 허망하게 삶의 끈을 놓았다. 지켜온 신념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럽고 두려웠을 마음의 한 자락도 나누지 못하고 우리에게 회한만 남긴 채 떠나버렸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그의 쓸쓸한 마지막 뒷모습을 찍은 시시티브이(CCTV) 사진 보도를 보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모두는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만들어가는 길의 추종자이자 동반자였다. 그가 개척한 길에 영감을 받으며 그를 따르고 존경하고 함께하고자 했다. 이런 그가 문제적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 앞에 각자의 서사와 정치·사회적 맥락에 따라 온갖 논쟁과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 논쟁 가운데 나는 그와 40여년을 함께하며 만들어왔고, 함께 만들고자 했던 이야기로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인물이었다. 때로 나는 “박원순의 신들메(짚신 동여매던 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우리의 존경에 숨은 자학적 좌절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2000년대, 일본·미국·독일 등 유수한 나라에 3개월간 시민단체 탐방을 다녀오고 나서 각 나라의 시민단체 활동을 소개하고 벤치마킹한 사업을 소개하는 책을 3권이나 낸 그는, 교환교수로 1년을 지내고도 자료 복사만 해 오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민주주의에 관해 적잖은 책을 냈던 나이지만, 그가 어느 날 분단 체제와 반민주적 체제의 근간인 <국가보안법 연구>(이후 ‘야만시대의 기록’으로 바뀜) 책을 냈을 땐 학자로서 좌절에 가까운 부끄러움이 일었다. 6년 동안 서울시 본회의장에 나란히 앉아 바라본 그의 의회 대처 모습에서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재건축과 고층 제한 규제를 풀어달라는 한 의원의 16번에 걸친 질문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의 일관된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모습에서 말이다. 환경적 가치와 투기 반대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잠실, 강서, 서울의 곳곳에서 또 최근 그린벨트 해제 요구까지 온갖 외부의 비판에 직면하여 뚝심과 의지로 맞섰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매번 잠실을 지나며 고층 제한 해제와 재건축 허가를 요구하는—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큰—비판 현수막에 표기된 친구 이름은 늘 생경하고 마음 아팠으며 부끄러웠다.

1994년 9월 참여연대 창립에 이어 95년 3월 제1회 정기총회 때부터 조희연 집행위원(왼쪽 둘째)과 박원순 사무처장(오른쪽 둘째)으로 함께 활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4년 9월 참여연대 창립에 이어 95년 3월 제1회 정기총회 때부터 조희연 집행위원(왼쪽 둘째)과 박원순 사무처장(오른쪽 둘째)으로 함께 활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허물-죽음 ‘무게’ 저울질 능력 없으니”
“고인 위해 피해자 비난 자제를”
“마음의 빚 안고 새로운 기대로 전진을”

1980년대 학술운동 초기부터 그와 함께했다. 그때 많은 학술단체들은 안정된 사무공간이 없어 전세를 전전했지만 오직 한 단체, 역사문제연구소는 지금도 번듯한 건물에서 안정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위안부 문제, 일제 강제동원 문제, 분단사학, 식민지사학을 극복해가는 가장 선도적이고 초기적인 연구자들의 단체였다. 그때 자신의 집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함으로써 기껏 회비 내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가 지금 무주택인 이유도 어려운 단체 후원이 먼저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참여연대 시절 그는 매일 아침 신문을 보고 10~20가지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 발상을 시민운동의 감시와 정책 속에서 실현하려고 고군분투했다. 우리는 다종다양한 그의 아이디어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고 그럴 때면 그는 사무처장을 그만둔다며 출근 중지의 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때 간사들과 함께 박원순의 집을 찾아가 그와 다시 결의를 모아 활동을 재개했던 기억도 있다.

그가 2011년 서울시장이 된 이후 ‘10년 혁명’을 통해 이미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우리는 이미 그가 9년 동안 고투하며 만들어온 변화한 서울에서 살고 있다. 토건과 전시행정으로 점철된 시정을 시민의 삶을 위한 생활행정으로 전환시켜 시행된 각종 복지정책이 우리 삶을 보듬고 있다. 세월호와 촛불항쟁의 광장이 시민에 의해 열리며 대한민국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그가 시민운동가로서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를 아래로부터 추동했다면, 시장으로서 그것을 지원하고 정책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광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함께 행정가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꾸었던 꿈을 서울에서 실현해보자며 참 많은 일을 함께 하였고 앞으로도 ‘시장 박원순’과 할 일이 수없이 남아 있다. 학교와 마을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지속가능한 도시로 나아가고자 하는 많은 정책을 만들었다. 마을혁신·교육혁신의 길을 이어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모든 약속을 뒤로하고 그는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인권, 환경, 역사정의, 투명성, 시민사회의 가치는 여전히 지켜져야 한다. 소셜디자이너이자 서울시장이었던 박원순의 이상은 시민사회로부터 출발하여 서울이라는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에까지 확산되었다. 그의 진보적 가치와 정책을, 대한민국 중앙정부의 가치와 정책으로까지 비상시키는 그의 비전은 중단되었지만, 이 역시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일 것이다.

지난 7월1일 서울시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생전 마지막 동행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7월1일 서울시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생전 마지막 동행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고, 좌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기대로 전진해야 한다. 나는 오랜 벗이자, 40년을 같이해온 동지로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으로 모든 정념을 다해 내 친구를 애도한다. 부디 이 절절한 애도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나 2차 가해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고인은 과거 각종 인권 사건을 변론하면서 “늘 피해자의 편에 서고 그 어려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런 그를 이해한다면 더 이상 피해자의 신상 털기와 비난을 멈춰주길 바란다.

나 또한 충격 속에서 그가 남긴 또 다른 숙제를 생각하며 끙끙대고 있다. 1995년 서울대 신교수 사건,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집요하게 변론하며 전환적 판결을 이끌어냈던 인권변호사로서의 모습과 그와 상반되는 또 다른 모습이 한 인간에 공존한다는 모순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각종 사회진보운동에 그래도 가까이 있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내가 늘 ‘죽일 놈과 좋은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식틀에서 세상과 사람을 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을 했다. ‘인간의 허물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를 비교하고 분리해서 저울질할 수 있는 능력’을 신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탓하면서도 그의 죽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난제이다.

너무도 비통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 그의 부재로 갈등이 더욱 불거졌지만 생전 그의 바람대로 피해자에게 비난이 더 이상 향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서로의 위치에서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 나는 박원순의 허물에 대한 새로운 각성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이 그에게 빚진 그동안의 헌신과 희생을 떠올리며 절절히 마음 깊이 애도한다. 그리고 박원순을 기억한다.

조희연/서울시교육감

※ 바로잡았습니다

◇2020년 7월13일 등록됐던 위 기사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에 대해 ‘피해자’와 ‘피해호소인’이란 표현이 함께 쓰였습니다. 필자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현재 피해자 보호를 위한 원칙과 젠더폭력에 대한 사회적 분노에 깊이 공감하며 당시 피해호소인으로 표현한 데 대해 피해자와 독자들께 사과 뜻을 밝혀왔습니다. 아울러 이를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해와 2021년 4월15일 모두 피해자로 바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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