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앞줄 왼쪽 둘째)와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들의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자료가 배포되는 동안 의견을 나누고 있다. 현장풀/한겨레 이정아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둘러싼 갈등이 세대를 가르고 있다. 기성 정치인들이 피해자를 지켜줘야 한단 목소리를 일축하고 추모에 집중하는 사이, 2030세대 정치인들이 앞장서 피해자와 연대하고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가에선 이번 의혹을 둘러싸고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책 마련 등을 위해 서울시와 정치권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대자보가 잇따르고 있다. 14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는 “설령 그 사람이 사회에 무수한 발자취를 남겼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증거와 관련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실이 알려져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문이 붙었다. 같은 날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게시된 대자보에도 “(박 시장의) 빈소에선 여당 정치권 인사들이 눈에 띄었고 성범죄를 언급한 인사는 손에 꼽혔다. 그들의 조문은 성범죄 고소인에게 침묵하라는 압박이자 2차 가해다”라는 규탄이 담겼다. 청년유니온 역시 성명에서 박 시장의 청년 정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치권은 피해자를 모독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사건을 앞에 둔 세대 간 민심은 여론조사에서도 갈렸다. 15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설문조사(전국 성인 1천명 대상, 신뢰 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4.4%는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는데, 20대(76.1%)와 30대(70.8%)에선 모두 응답 비중이 70%를 넘겼다. 반면 50대는 56.1%, 60대는 60.5%로 차이를 보였다. 특히 2030세대는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넘어, 기성 정치인들이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두고 분노했다고 했다. 앞서 정의당 소속 장혜영, 류호정 의원이 박 시장을 “조문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입에서 젖내 난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진 바 있다.
청년들은 성별과 상관없이 “기성세대가 젠더 이슈를 아직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대학생 김가람(24)씨는 “기성 정치인들은 박 시장의 장례 형식만을 얘기할 뿐 피해자 보호대책 등에 대해선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며 “성폭력 사안은 형사절차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짚었다. 성폭력 문제의 형사적 해결을 넘어선 ‘공동체적 해결’에 대해선 인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대학생 송아무개(26)씨도 “미투 운동 이후엔 성폭력에 대한 대응도 달라져야 하는데 과거와 비슷한 안일한 대처가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행동으로 기성 정치권을 압박하겠단 의견도 있다. 이아무개(32)씨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날 ‘당 차원의 진상조사가 어렵다’고 밝힌 것을 두고 “청년 세대에선 젠더 이슈가 커다란 화두인 반면 기성세대는 그렇지 않다. 보궐선거도 있는데 보궐선거에서 투표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선기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은 “‘진보’ 진영의 청년들은 기성 정치권의 성인지 감수성에 환멸을 느끼고 대응을 요구해왔다. ‘청년 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기성세대 다수의 인식과 달리, 청년들이 직접 정치적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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