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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뉴스AS] ‘피해호소인’ 명명 논란, 문제는 ‘태도’와 ‘맥락’이다

등록 2020-07-17 16:28수정 2020-07-17 17:31

박원순 성추행 피해자 명명 둘러싼 논란
‘피해호소인’ 호명 고집해온 민주당, “‘피해자’로 통일”
통합당 “이 사건 깎아내리려는 것 아니냐” 비판
여성단체들도 ‘이중적 태도 버려라’ 촉구

‘피해호소인’은 반성폭력운동 진영의 조어
‘피해자를 보호하고, 호소를 경청하자’ 취지
문제는 단어 자체보다
“진상규명 못한다”는 여당의 태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고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동안 김태년 원내대표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고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동안 김태년 원내대표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둘러싸고 ‘호칭’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는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온 반면, 여성계는 ‘피해호소인’은 현 상황에서 적절한 표현이 아니며, ‘피해자’로 지칭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미래통합당 쪽에선 “민주당이 이 사건을 ‘의혹’ 수준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피해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와 ‘피해호소인’. 얼핏 들으면 의미상 큰 차이가 없어 보이나, 박 전 시장을 추모하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데 무엇이 적절한 표현일지에 관한 양쪽의 의견차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부 여당 지지자들은 피해자의 고소 내용이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으니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해호소인’이나 ‘고소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피해자’로 지칭할 경우 박 시장을 ‘가해자’ 혹은 ‘범죄인’으로 기정사실화하게 되며 이는 ‘사자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주장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17일 뒤늦게 호칭을 ‘피해자’로 통일하겠다고 밝히기 전까지 ‘피해호소인’이란 표현을 고수해왔습니다. 지난 15일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공식 사과에서도, 14일 나온 민주당 여성 의원들의 성명서에서도 모두 ‘피해호소인’ 또는 ‘피해호소 여성’이란 명명이 눈에 띕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이전 ‘미투’ 폭로에선 사건 초기부터 ‘피해자’라고 지칭했던 것과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성계와 법학자들은 ‘피해자’ 표현을 사용하는 데 법적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행 성폭력처벌법은 사건의 조사 및 심리·재판에 관한 규정에서도 신고인 및 원고를 ‘피해자’로 칭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유죄 확정판결 전까지 피고소인 및 피고를 무죄로 추정해야 하는 원칙과 별개로 신고인이나 고소인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적절한 보호와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단체들도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시와 민주당에 “고통을 말하는 ‘피해자’에 대해 ‘피해호소인’ 등으로 호칭하며 유보적, 조건적 상태로 규정하고 가두는 이중적인 태도를 멈추라”고 촉구했습니다. ‘피해자’ 대신 ‘피해호소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주당 등이 되레 피해자를 외면하고 성폭력 의혹 해결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야당인 통합당 또한 여당이 ‘피해호소인’이라고 말하는 건 “그 자체로 2차 가해”라고 비난합니다. 또 피해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가해자를 비호하기 위해 “여당이 없던 말을 만들어냈다”고도 주장합니다.

하지만 ‘피해호소인’으로 부르는 게 꼭 ‘2차 가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부터 학교, 직장 등 여러 공동체에서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때 ‘성폭력 신고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리를 구제해야 한다는 취지로 신고자를 ‘피해호소인’으로 불러 왔습니다. 반성폭력 운동 진영에서 먼저 제안된 명명이라는 겁니다. 조사·상담·중재 등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고인’이나 ‘고소인’ 대신 ‘피해’를 명시한 ‘피해호소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사실이 확인되기 전에도 문제를 제기한 신고자를 보호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줄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단어가 사용된 맥락입니다. ‘피해호소인’이란 호명을 고집해온 이해찬 대표는 15일 공식 사과에서 “고인 부재로 당 차원의 진상조사는 어렵다”며 성인지 교육 강화 등을 후속대책으로 내놨습니다. ‘피해호소인’이란 명명은 원래 ‘피해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상조사는 어렵다’는 답을 피해자의 호소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결국 여야 모두 정치적 목적을 위해 ‘피해호소인’이라는 명명을 곡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피해자가 심각한 2차 가해 속에 절박하게 목소리를 냈는데도 진상규명에 나설 수 없다고 밝힌 민주당도, 여당을 비판하기 위해 ‘피해호소인’이란 명명을 공격하지만 그 말이 담은 반성폭력운동의 역사를 몰각한 야당도 모두 여성들이 성폭력에 맞서 싸워온 과정을 입맛에 맞춰 이용하거나 지워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겨레>는 지난 13일부터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여성을 ‘피해자’로 적고 있습니다. 피해자 쪽이 기자회견을 통해 바깥 세상에 피해를 알려왔기 때문입니다. 위력에 의한 성추행 피해를 공개적으로 밝힌 만큼 그는 ‘피해자’로서 명예를 보호받고 진실을 규명하겠단 약속을 사회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피해자가 된다고 해서, 박 시장이 곧 ‘범죄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한 걸음 더 깊이 고민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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