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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광고 훼손의 전말…우리는 하루 몇번씩 ‘그 안부’를 묻는다

등록 2020-08-08 07:34수정 2020-08-08 07:48

[토요판] 뉴스 분석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광고 테러

커터칼에 훼손된 성소수자 광고
얼굴 드러낸 성소수자와 지지자
517명 얼굴과 존재 지우는 위협
게시부터 공공기관 거부 부딪혀

훼손된 자리에 포스트잇 붙이고
복구 작업 함께한 시민도 있어
‘성소수자 싫어서’ 범인은 잡혀도
다시 훼손될까 시민감시단 활동
지난 8월3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지하철역에 훼손되었던 성소수자 광고판이 다시 설치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8월3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지하철역에 훼손되었던 성소수자 광고판이 다시 설치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한장의 사진이 위협당하는 성소수자 인권을 상징하는 일이 있었다. 지난 8월2일 서울 신촌 지하철역에 걸린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 광고가 커터칼에 찢겨진 사진이 빠르게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갔다. 마침 이 광고는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에 맞춰 제작된 것이었다. 이 광고 제작에 참여한 잇을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가 제작 과정부터 부딪힌 차별과 시민의 응원을 글에 담았다.

지난 8월2일,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지하철 광고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가 무참히 훼손됐다. 가로 4미터 세로 2.25미터에 달하는, 수백명의 성소수자와 그 지지자의 얼굴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광고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인 필자는 그것이 알아볼 수 없게 모조리 찢긴 광경을 사진으로 전달받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긴급하게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간 무지개행동 활동가 일동은 그사이 깨끗하게 치워진 광고 앞에서 망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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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517명의 얼굴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은 해마다 5월17일에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경종을 울리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도 2012년부터 다양한 캠페인과 활동을 진행해왔고 2019년에는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 약 500명이 야간 거리행진을 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대규모 행사를 열 수 없는 상황에서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는 광고를 준비하게 되었다. 등하굣길과 출퇴근길에 이용하고, 어디론가 이동하거나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 들르는 일상의 공간인 지하철 역사에 광고를 설치해 성소수자가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시민들에게 ‘517개의 얼굴들’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성소수자와 그 지지자의 얼굴을 드러내면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다’는 메시지가 직관적으로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소수자가 얼굴을 드러내는 데는 아직 큰 용기가 필요한데도, 짧은 기간 동안 거짓말처럼 243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정면을 응시하거나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들, 각양각색의 장소, 저마다의 추억이나 사연이 깃든 사진들이 모이자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많은 분들이 ‘사진 크기가 작거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진을 더 보낼 테니 연락해달라’는 적극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무사히 게시되길 바란다’는 응원 메시지도 많았다. 광고를 위한 모금에도 순식간에 400여만원이 모였다.

하지만 광고 심의 신청부터 성소수자 차별과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하철에 광고가 게시되기 위해서는 광고 시안이 서울교통공사의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서울교통공사에 바로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대행사를 거쳐 절차가 진행되고 그 결과도 받아보게 된다. 가장 먼저 상담한 2곳의 대행사는 우리 광고를 기피해 결국 세번째로 견적을 받은 대행사와 일을 진행했다. 심의기간은 대개 10일이지만 상업광고가 아닌 ‘의견광고’는 1개월이 걸리고,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지하철광고는 성소수자 관련 광고이므로 심의에 1개월 이상이 소요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5월12일 심의 신청을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광고가 부당하게 거부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지만, 서울교통공사는 공공기관이므로 광고 게시를 거부할 경우 그에 맞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터였다. 6월11일 대행사는 불승인 결과를 전했다.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청했지만, 대행사도 서울교통공사로부터 전화 통보를 받은 것이 전부이고, 결정 근거나 심의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근거도 없이 ‘불승인’ 세 글자만 통보한 것은 더욱 충격이었다. 더구나 대행사는 서울교통공사가 재심의를 해도 불승인이 날 테니 재심의를 신청하지 말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서울교통공사에 공문을 보내 심의 내역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외부광고심의위원회 개최 결과 10인 중 6인이 거부해 불승인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정보공개청구도 거부되었다. 반대의 6표가 무엇에 근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광고를 제작한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이 광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제공
광고를 제작한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이 광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제공

의견광고는 정해진 체크리스트로 평가한다. 평가표를 살펴보면 우리의 광고는 ‘정치/성별영향/이념·인권·종교영향(특정 계층에 대한 왜곡된 시각/차별, 인권의 경시 등)’ 등의 점검항목 중 아무 해당 사항이 없다. 다만 ‘기타 사회적 논란/민원 발생 가능성’이라는 세목에서 ‘의견이 대립하여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로 판단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의 존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와야 한다는 모순적이고 폭력적인 요구는 여전했다. ‘국제인권기준 및 규범을 준수하며 국적, 성별, 종교, 장애, 인종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서울교통공사 인권경영 선언문은 허울뿐이었다.

6월24일에 재심의를 신청했지만 다시 어처구니없는 통보를 받았다. 대행사는 6월26일 ‘설령 광고가 게시되더라도 민원 발생 시 철거될 수 있으며 이 경우 환불이 불가하다’고 전하고, 6월29일 이메일로도 같은 내용을 보내왔다. 이것이 매뉴얼이니 동의해야 재심의를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불합리한 조건의 조건부 재심의 접수, 조건부 광고 게시였다. 모든 광고가 똑같이 철거 조치를 당하는지, 모든 민원이 불승인, 재심의 거부, 철거, 환불 불가의 이유가 되는지 의문이었다. 7월7일,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은 서울교통공사의 성소수자 차별을 규탄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공공기관이 민원을 피하기 위해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017년에도 서울 동대문구가 여성 성소수자 생활체육대회(퀴어여성게임즈)의 체육관 대관을 부당하게 취소한 사례가 있다. 2019년 5월, 동대문구가 ‘합리적 이유 없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진정인을 불리하게 대우한 것’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과 시정권고가 나왔다. 현재 동대문구에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도 진행되고 있다.

7월14일, 불과 한달 전에는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던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광고가 재심의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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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신촌역으로 가다

마침내 8월부터 한달간 신촌 지하철역 안에 광고를 걸게 되었다. 광고 첫날 그 실물 앞에 서니 애틋함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은 광고 속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의 얼굴 하나하나에 몇번이고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8월2일 동틀 무렵, 누군가 광고판을 커터칼로 난도질한 것이다. 재물손괴일 뿐 아니라 증오범죄이며, 공공장소에 성소수자를 드러내지 말라는 위협이었다. 광고가 훼손된 현장 사진과 함께 이 사건이 온라인에서 널리 알려졌다. 이런 광고조차 이틀을 못 가 훼손당하는데 성소수자 차별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 성소수자의 존재조차 인정할 수 없냐는 괴로움과 답답함을 쏟아냈다. 얼굴 사진을 모조리 찢고 훼손한 광경은 그것을 보는 어느 성소수자에게라도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난 3일 커터칼에 훼손된 성소수자 광고가 있던 자리에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3일 커터칼에 훼손된 성소수자 광고가 있던 자리에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날 오후 1시, 나는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다 늦게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꽉 막히는 걸 느끼며 주위에 훼손된 사진을 보여주자 다 같이 ‘헉’ 숨을 몰아쉬었던 것 같다. 누군가 탄식했고, 한참을 말도 못 하다가 누가 작게 ‘난 이제 화도 안 나’라고 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익숙한 좌절감이 뭔지 알기 때문에 더 화가 나서 현장으로 갔다. 그사이 대행사가 찢긴 광고 위로 흰 펼침막을 덮어씌워 임시조치를 해둔 상태였다. 말끔히 사라진 광고는 마치 우리의 목소리와 얼굴이 삭제당한 것과 같았다.

광고가 게시될 때 캠페인 기획단은 이미 이 광고가 훼손될 상황을 의논했었다. 성소수자 혐오가 반복되어온 만큼, 성소수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도 끈질기게 이어져왔다. 우리의 메시지가 한차례 지워진 그 자리를 다시 채울 방법부터 모색했다. 포스트잇을 붙여 크게 성/소/수/자 한 글자씩을 만들고, 증오범죄가 아니었다면 어떤 광고가 걸려 있었을지 알리는 내용도 붙였다. 복구 작업을 하는 동안에 소식을 듣고 온 시민들이 몇번이나 시원한 음료를 건네고 힘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또 곁에 서서 포스트잇에 같이 메시지를 남기고 사진을 찍어가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서 13년 산 성소수자 다녀감!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고 적었고, 그날 많은 성소수자들이 방문하여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외침, 서로를 향한 응원과 다짐의 포스트잇 메시지를 이렇게 남겼다.

‘신촌에 살아요. 나도 같이 서울 살고 있어요!/ 해방촌에 사는 젠더퀴어 바이섹슈얼입니다. 우리도 세금 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지우지 마세요./ 서울 사는 트랜스젠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은평구에 사는 성소수자 왔다 감./ 경남에서 왔다 감. 전국 어디든 우리는 존재한다. 성소수자 파이팅!/ 찢기고 훼손되더라도 우리의 존재는 지워지지 않는다. 서로를 이어주는 수많은 존재들이 함께할 것이기에!/ 연대는 혐오보다 강하다./ 성소수자를 지우지 마라.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누구든 안전한 일상에서 살아갈 권리는 있습니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어요. 당신의 곁에도 존재할 수 있는 퀴어 그대로 받아들여주세요.’

지난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역에 훼손되었던 광고판이 다시 설치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역에 훼손되었던 광고판이 다시 설치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8월3일 새벽에는 포스트잇도 신원미상의 범인에 의해 훼손되어서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 다행히 광고를 찢은 범인은 금방 경찰에 잡혔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성소수자가 싫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8월3일 오후부터 광고가 다시 게시되었고, 8월 마지막 날까지 더는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많은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시민감시단’으로 활동 중이다. 신촌역 인근을 지날 때 광고 게시 상황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 ‘#아이다호_지하철광고 #성소수자는당신의일상속에있습니다 #권리야빛나라’ 해시태그와 함께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방법이다. 우리는 광고 안부를 묻는 걸로 하루를 시작해서 하루에 몇번씩 광고가 잘 있는지 확인한다. 종일 끊이지 않고 시민감시단이 광고를 같이 지켜보니 든든하고, 광고의 여백에는 포스트잇 메시지와 스티커가 나날이 더해지며 성소수자가 여기 존재한다고 크게 외친다. 어떤 성소수자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응원을, 성소수자의 존재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성소수자가 동료 시민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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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보다 빠르게 퍼진 이미지

‘성소수자는 당신의 혐오를 이길 겁니다.’ 한 시민이 찢어진 광고 사진 위에 만든 디지털 이미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빠르게 공유되어 한 편협한 자의 증오범죄보다 힘 있게 퍼져나갔다. 우리는 성소수자 혐오를 이길 것이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광고 게시를 거부당하지 않도록, 성소수자가 증오범죄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공적으로 일상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캠페인할 것이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이며,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하나씩 바꿔나갈 것이다. 평등의 외침은 반드시 증오와 폭력을 이긴다.

잇을 2020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기획단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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